▲ 이지현 교무/모현교당

지난해 학생법회 시간. 시험을 앞둔 학생들에게 심고와 기도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열심히 공부한 후 심고를 올려보라고 했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도 불공을 드려야 한다고. 법회를 본 다음 주 남학생 교도가 주중에 찾아왔다.

"내일 수학 시험을 보는데 법당에서 4배하고 가려고요."

정말 뜻밖이었다. 헌공금도 준비해 불전에 올리고, 심고 후 4배를 하고 돌아갔다. 그리고 다음 날 문자가 왔는데 수학을 백점 맞았다고 했다. 법회 때 한 말을 가볍게 듣지 않고 실천하여 본인 스스로 기쁨을 얻었으니 당시 나는 참 기뻤고, 교화의 보람을 느낀 순간이었다. 그 남학생은 내가 모현교당에 처음 왔을 때 조금은 거친 모습이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지속적인 칭찬과 격려를 해주며 챙겼다. 신기하게도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법회 시간에 간식을 먹은 후 설거지도 말끔히 해놓기도 하며, 가끔 주중에도 주임교무님과 같이 드시라며 빵을 사오기도 했다. 이렇게 청소년 교화를 하다 보면 보람의 순간이 찾아오기도 하는 반면, 사건 사고도 끊이지 않는다.

그 남학생이 어느 날 법회 시간에 학생회에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여학생에게 계속 말을 거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냥 넘어가려 했으나 그 여학생에게 점점 불편한 기색이 보여 장난스럽게 여학생을 너무 좋아하지 말라고 말했다. 그때 옆에 다른 후배 학생들이 맞장구를 쳤다. 순간 남학생의 표정이 싹 변했다. 후배들이 자기를 무시한다고 생각했나 보다. 그리고 무시하게 만든 원인은 교무님한테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어느 날 손을 부르르 떨며 격한 감정을 내 앞에서 표출했다.

청소년기에는 질풍노도의 시기라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 친구의 감정을 다스리려고 얼떨결에 사과를 했다. 그렇게 마무리 지었지만, 마음은 심하게 요동친 상태였다. 마음이 풀리지 않은 채 그 남학생은 집으로 돌아가고, 나는 한참 동안 멍했다.

그날 저녁 주임교무님을 모시고 식사를 하는데 밥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그 동안 내가 얼마나 불공을 했는데, 별 것 아닌 그런 일 때문에 이렇게 대들다니 하는 억울함이 밀려왔다. 또 어린 고등학생의 감정에 교무인 내가 심하게 요동친 것이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주임교무님은 원래 아는 사람이 져주는 것이라 하셨다. 그 말씀을 듣고 생각했다. 부처님도 '나는 부처고 너는 중생이니, 부처인 내가 중생인 너를 제도하겠다' 이러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음 가운데 나는 부처라는 상 없이 모든 대상이 그저 불공해야 할 부처뿐인 그 마음에는 교무라는 상도 없고, 나이 많다는 상도 없고, 그동안 내가 이렇게 해줬는데 하는 상도 없을 텐데. 억울함과 상한 자존심이 한 번에 풀리지는 않았지만, 생각이 그렇게 흐르니 다시 사과할 마음이 들어 휴대폰 문자메시지로 용서를 구했다. 몇 주 뒤 그 남학생에게서 자기도 죄송했다는 사과 문자가 왔다.

이렇게 기쁨도 있고, 보람도 있고, 때론 시련이 오기도 하는 것이 교화 최전선지의 모습이다. 영화 '고지전'을 본 적이 있는데, 상부에서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상황이 펼쳐지는 최전방 고지에서는 그 곳 실정에 맞게 그들만의 질서와 방식으로 치열하게 생사를 오가며 살고 있었다. 각 교당의 청소년 교화도 마찬가지의 모습 같다. 처한 상황들이 얼마나 다양하겠는가. 큰 그림의 정책들도 참 중요하고,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지만, 최전선지에서 직접 부딪히며 교화해 나가는 청소년 교화자들의 각개전투가 매우 중요한 것 같다.

각개전투 속에서 교화자 스스로는 조금씩 성장할 것이고, 정성이 한도에 차면 교화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 생각한다. 함께 청소년 교화를 하고 있는 교무들에게 응원의 마음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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