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분공심 말고 전체공심으로 교단 봐야
적공·사심제거, 사업 무조건 교화위주사업종

김원도 (주)와이즈비젼 회장이 법문 명함을 들어보이며, 대산종사에게 받은 삼학법문을 설명하고 있다.

 

■ 신년 특별인터뷰

[원불교신문=나세윤] "교단 병폐 중 하나는 토론과 회의는 많은데, 결과적으로 결단을 못 내린다는 겁니다."단도직입적이다. 인터뷰를 준비할 틈도 주지 않고, 묵직한 돌직구를 던진다. (주)와이즈비젼은 서울 신대방역 뒤편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 회사 창업자이자 교단에 회사 전체를 희사한 연산 김원도(78·본명 김평수) 회장. 그의 말에는 냉철한 분석과 함께 교단에 대한 애틋함이 가득하다. 김 회장의 공심은 인터뷰가 진행된 3시간 내내 곳곳에 묻어났다. 한겨울 칼바람에도 생명의 생기와 열정이 차오르듯 그의 이야기를 듣노라면 절로 치열해지고 한편 겸손해졌다. 첫마디가 전무출신 용금제도 개선 무산에 대한 아쉬움이었다.

실속 있는 교단이 미래를 담보한다고 강조한 그는 원창회 활성화의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동안 원창회장은 교정원장이 당연직을 맡아 왔습니다. 운영위원도 대부분 출가가 참여했고요. 올해 4년째 회장을 맡고 있는데, 원창회비가 생각처럼 걷히지 않습니다. 1년에 13억 원을 총부 등에 지원하고 있지만, 회비수입은 불과 2억 원 정도입니다. 예전에 비하면 굉장히 줄어든 것이지요." 걱정과 고민을 털어놓은 그는 무분별한 CMS 권장은 막아야 한다고 언급했다. 가까운 인연끼리 후원하는 형태는 교단 목적사업과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한정된 교단의 재화를 한 곳으로 모아야 역동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원창회는 총부유지·전무출신 후원·해외지원 불사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교단이 외형적으로 커졌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합니다. 그러나 내실은 다른 문제입니다. 얼마 전 남자원로원 초청 강연 자리에서 '원로교무님들이 그렇게 살아왔다고 너무 야단치지 말아 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지금 시대는 예전과 완전히 다른 세상이라고 전했고, 더 많이 격려해 주고 어루만져줘야 한다고 이야기했죠. 사실 젊은 교무들은 고민과 걱정이 아주 많아요." 출가자가 줄어드는 첫 번째 요인을 전무출신 후생문제라고 지적한 그는 어떤 것이 내실을 기하는 것인지를 극명하게 표현했다. 현재 와이즈비젼 직원들은 입사부터 대다수가 퇴사하지 않은 이유가 동종업계 평균을 넘는 대우를 하기 때문이란다.

"(주)와이즈비젼을 창립해 교단에 희사할 때 스승님들의 염려가 많았습니다. 100% 다 희사하지 말고, 연산 명의로 30%는 가지고 있어라. 전부 희사하면 어떻게 되느냐. 지분 30%면 지금의 자산규모로 18억 원 이상입니다. 하지만 이런 조언에도 흔들림 없이 전부 내놓았습니다. 주식을 가지고 있으면 욕심 부리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고, 또 내 신변에 이상이 생기면 가족들과 유산문제로 말썽이 생길 겁니다. 내가 내 욕심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앞으로 주식이 한 주도 없다고 말한 그다. 꾸준한 성장세와 안정적인 수익이 보장된 회사를 교단에 희사하면서 교정원의 재정은 더욱 튼실해졌다.

"와이즈비젼은 김장원 재정부원장이 재직할 때 내가 회사설립을 제안했어요. 이제 교단이 커졌으니 기관을 관리하는 자체 용역회사가 있어야 한다고 건의한 것이지요. 사실 내가 퇴직금 1억 원을 투자해 창립(2006년 6월1일)한 지 3개월 뒤의 이야기죠. 100% 내 개인회사를 만든 지 3개월 만에 암 진단으로 수술을 하게 됐습니다. 회사의 비전은 보이는데, 내가 살 수 있다는 보장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결단을 했죠. 회사를 관리할 수 있는 교무를 파견해 달라고 교단에 요청했습니다. 와이즈비젼은 교단과 외부, 6대4 정도의 비중으로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의 결정은 그대로 실행돼 오늘날의 와이즈비젼으로 성장했다. 

"교단 수익기관들도 성장을 위해 꾸준한 재투자가 필요합니다. 조금 수익이 났다고 총부에서 회수해 가는 것은 잠재적 미래성장을 빼앗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와이즈비젼은 앞으로가 중요합니다.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가사도우미' 사업을 전략사업으로 정해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습니다. 정부도 이 제도를 정책에 반영할 예정인데, 시행 4년째를 맞은 대만에서는 전망 좋은 사업으로 손꼽히고 있어요."

용역회사 소속의 직원(가사도우미)이 파견돼 맞벌이 가정을 돌보는 제도라는 것이다. 국민소득 3만 달러 이상의 나라에서 보편화되고 있는 제도라고 귀띔한다.
'연원이 없는 교도'라고 밝힌 그는 전생에 원불교와 인연이 깊었던 것 같다는 말로 입교 배경을 설명했다. 그가 전주남중학교를 다니던 시절, 우연히 어느 골목을 지나다 교동교당 교리강습회를 본 것이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골목 안으로 누군가에 의해 끌려 들어간 것 같다'고 했다. 마침 내리던 비는 교동교당 양철지붕과 맞닿으며 분위기마저 좋았다고 회상했다. 구타원 이공주 종사가 교리강습 강사로 나서 열정적인 법문을 하고 있을 때였단다. '참을 인(忍)'자 법문을 기억하고 있는 그는 당시 주무로 있던 해타원 유해일 교도가 뒷자리를 양보해줘 겨우 앉아서 법문을 들을 수 있었다. 그의 나이 16세 때 일이다. 그 주무는 강습회가 끝나고 나가려던 소년의 손을 잡고, 내일도 강습회가 있으니 꼭 오라고 당부했다. 그 인연으로, 입교 없이 학생회를 다니다가 대학생이 된 뒤에야 오성수 교무의 추천으로 입교하게 됐다고 추억을 되살렸다.

"교단이 100년을 숨 가쁘게 뛰어오면서 성장에 비해 분배에 소홀했다고 생각합니다. 출가들의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외연확장에 눈을 돌리고 있어요. 회사나 종교도 모두 함께 성장해야 불만이 없습니다. 차별과 불평등이 계속되면 어느 기회에 터지게 됩니다. 젊은 세대 교무들은 기성세대 교무들과 많이 다른 것 같아요. 특히 현장에서는 세대 혹은 교무 간의 알력으로 교도들이 누구의 비위를 맞춰야 하는지 곤혹스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교도들이 교단을, 출가공동체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우려의 목소리에도 새해 교단과 교도들에게 거는 기대가 유달리 컸다.
"무술년 새해에는 '전체 공심'으로 '하나'가 돼야 합니다. 출가나 교도들 모두 성실한데, 전체가 아닌 부분 공심으로 산다는 느낌이 드네요. 교단은 대기업이나 기성 종교에 비해 규모가 작은 조직입니다. 그럴수록 교단의 방향에 맞춰 하나로 뭉쳐야 하는데, 개인과 소속 조직에 더 충실한 것 같습니다. 둘째로는 함부로 교단을 헐뜯고 부정적으로 말하지 말자입니다. 안 좋은 이야기가 계속 돌게 되면 교화나 사업, 마음공부도 쳐집니다." 교단의 구성원들이 전체 공심과 긍정 에너지로 충만해 자신의 일터를 개척하라는 덕담으로 읽힌다.
"내가 잘 쓰는 말이 있습니다. 뜨거운 쇠가 찬 쇠를 달구려면 뜨거운 쇠가 훨씬 더 뜨거워져야 찬 쇠를 뜨겁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뜨거운 쇠가 미지근하면 데워지지 않아요. 신앙도 적당한 믿음이 아닌 뜨겁게 달궈진 신앙이어야 하는데, <정전>을 너무 수행중심으로 해설하고 있습니다. 대종사님의 법문 하나 토씨 하나를 깊이 이해해서 위대한 주세성자로 모셔야 하는데, 단상 설교는 대종사님의 말씀보다는 재래불교의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호칭도 대종사라기보다 '소태산여래'라 해야 하지 않을까요?"

모든 일은 적공으로 쌓이고 쌓여야 되는 법이다. 그래서 그의 공부표준은 '적공과 사심 제거'라고 했다. 그리고 기업인으로서 좌산상사의 경영법어(지자본위의 인사·자리이타의 거래·정법정도의 원칙·안여반석의 조치)를 사무실에 걸어놓고, 사업의 방향로를 잡고 있다. 대산종사와의 특별한 인연은 법문으로 간직하고 있다.
"14년 동안 휴가를 가족과 함께 대산종사가 계시는 곳으로 다녔습니다. 그때 주신 법문이 '침착해서 자기를 이겨라. 생각해서 길로 나아가라. 근면해서 보은해라'였죠. 이 법문을 주시면서 다음 휴가 올 때는 연마해 오라는 하셨죠." 그랬다. 신도안, 완도 등 대산종사가 주석한 곳이라면 어김없이 찾아뵈었던 그는 그날 받은 법문을 40년 넘게 마음에 새기고 있다. 그의 명함 뒷면에 대산종사가 손잡아 주며 내렸던 그 법문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명함을 받은 사람마다, 그 뜻을 물으니 교화는 덤이었다. '교화위주사업종(敎化爲主事業從)'. 그의 서원이자 사업의 나침반이다. 사업기관 운영으로 교화의 희망을 만들고 있는 그는 영원한 현역으로 왕성하게 현장을 누비고 있었다. 

[제1873호/2018년1월5일자]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