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사의 성공에 이 삼학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니, 이 위에 더 원만한 공부 길은 없나니라"(〈정산종사법어〉 경의편 13장)는 말씀처럼, 원불교 수행의 요체가 삼학임은 누구나 인증하는 바다.
〈정전〉 교의편에 '삼학'은 확고한 교리로 자리 잡았으며, 〈대종경〉 서품 19장, 교의품 18장~22장까지, 수행품 2장, 〈정산종사법어〉 경의편 13장~20장까지, 삼학과 삼학병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씀들이 아주 많다.
특히 정산종사께서 과거의 계정혜 삼학과 우리 삼학의 차이점을 밝혀주신 말씀을 보면 우리 삼학이 얼마나 원만하고 광대한가를 알 수 있다.

게다가 수양의 방법은 염불과 좌선, 무시선과 무처선이 주가 되고, 연구의 방법은 견문, 학법, 사고가 주가 되며, 취사의 방법은 경험과 주의와 결단이 주가 된다고 하셨으니(〈정산종사법어〉 경의편 15장), 일방 수행이 아닌 삼학의 병진으로 인해 이 모든 과목을 다 공부해야 하므로 불교나 타종교에 비해 한 사람이 배우고 공부해야 할 것이 참으로 많다 하겠다.
그래서일까, 소태산 대종사는 이 삼학 공부를 어떻게, 얼마나 해야 하는지를 두 가지로 말씀했다. 그 하나는 '오래오래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계속 하는 것'이다.
〈정전〉 삼학의 결과에, "우리가 정신 수양 공부를 오래오래 계속하면", "우리가 사리 연구 공부를 오래오래 계속하면", "우리가 작업 취사 공부를 오래오래 계속하면"이라고 동일한 문장이 반복되는 것은 삼대력을 양성하는데 이 두 가지 자세가 아니면 도무지 달성할 수 없음을 강조한 것이다. 이 말씀은 염불의 공덕, 좌선의 공덕에도 나오며, 무시선법(사람이 만일 오래오래 선을 계속하여 모든 번뇌를 끊고 마음의 자유를 얻은 즉)에도 있다.
생각해보면, 오늘날 어디에 공부를 오래오래 계속하라고 가르치는 곳이 있던가. 효율주의와 성과주의로 무장한 세상 사람들에게는 그저 하품 나는 방법일 뿐이며, 시대에 맞지 않는 묵은 말씀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빨리 빨리" 정신과 단기속성과정이 넘쳐나는 이 자본주의 경쟁 시대에 "오래오래 계속" 하라는 말씀은 도리어 단호해 보인다.

1만 시간의 법칙을 들먹일 필요도 없이 만고에 변치 않는 공부법이라는 말씀이고, 계교심 없이 하고 하고 또 하라는 말씀으로 들린다. "오래오래 계속" 한다는 것은 단순히 시일의 길고 짧음만이 아닌, 순리이고 정성이며, 이소성대이며, 삶과 세상을 대하는 관점과 태도이다.
멈추지 않는 것, 끊어지지 않는 것, 꾸준히 이어가는 이 면면약존의 정신은 팔조의 성(誠)이며, 천지의 지극히 정성한 도와 같은 것이다.
욕속심을 내려놓으면 더 이상 속도는 의미가 없다. 방향이 더 중요하다. 흔히 행복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고 하는데, 교육도, 공부도, 수행도, 신앙도, 그리고 우리가 원하는 교화도 모두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다시 새 해를 맞는다. 그 방향 그 길로 오래오래 갈 뿐이다. 흐르는 물처럼 간단없는 정성으로 그렇게 나아갈 뿐이다.

[제1873호/2018년1월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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