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원익선 교무] 소태산 대종사는 불교의 삼학과 원불교의 삼학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설한다. 따라서 취사는 계며 솔성이라고 한다. 그리고 모든 계율과 과보 받는 내역과 사은의 도를 단련해 세간 생활에 적절한 작업 취사의 과목을 정해 부처님과 같이 불의와 정의를 분석하고 실행하는 취사력을 얻게 하는 것에 목표가 있다고 한다.

전통적으로 계율은 신·구·의 삼업을 통제해서 모든 악을 막고 선을 쌓는 규범이나 규율을 말한다. 계는 좋은 습관이나 도덕성을 기르기 위해 자발적으로 실천하도록 하는 규정이며, 율은 훈련이나 조복을 통해 조직을 통제하는 의미에서 타율적으로 설정된 규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궁극적으로 이 계율은 〈증일아함경〉에서 설하듯이 '일체의 악을 짓지 아니하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여 스스로 그 뜻을 깨끗하게 하면 이것이 바로 부처의 가르침'이라는 핵심을 떠나지 않는다.

대승불교 또한 이 가르침을 받들어 〈유가사지론〉에서는 계율의 핵심을 3취정계로 나타낸다. 섭율의계는 모든 악을 막는 것, 섭선법계는 적극적으로 모든 선을 행하는 것, 그리고 섭중생계는 모든 중생을 교화하고 이익을 주기 위해 모든 힘을 다 쏟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가르침은 불교가 중국에 건너와서도 변함없이 여러 종파의 가르침의 근간을 이룬다.

작업취사에서는 "우리 인류가 선(善)이 좋은 줄은 알되 선을 행하지 못하며, 악이 그른 줄은 알되 악을 끊지 못하여 평탄한 낙원을 버리고 험악한 고해로 들어가는 까닭은 그 무엇인가"라고 질문하며, 시비를 몰라 실행이 없거나 안다할지라도 욕심이나 습관에 끌려서 악은 버리고 선을 실행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정의는 용맹 있게 취하고, 불의는 용맹 있게 버리는 것이 결국 취사력임을 밝힌다.  

원불교의 신앙과 수행의 최종 귀결은 이 정의이다. 정의의 가르침은 교의편에서는 사은의 법률은, 삼학의 작업취사, 수행편에서는 무시선법, 솔성요론, 최초법어에 등장한다. 법률은을 인도정의의 공정한 법칙이라고 한 것은 일원상의 진리가 이 세계에 그렇게 드러난 것을 의미한다. 진리적 정의를 육근으로 실천하는 것이 작업취사인 이유는 진리세계를 이 땅에 구현하기 위한 것이다. 소태산 대종사가 교의품에서 현묘한 진리를 깨치려하는 이유가 그 진리를 실생활에 활용하기 위함이라고 한 뜻이 여기에 있다. 원만한 수행은 다름이 아닌 정의의 실천을 의미한다. 말씀대로 그것은 이 우주 전체가 죄복의 사실적 권능이 있기 때문이다.   

대산종사 또한 작업취사에 대해 수덕지선(修德至善)의 강령 하에 정할 때는 안으로 계율을 지켜서 모든 악을 끊는 내수계율(內修戒律)의 공부를, 동할 때는 밖으로 정의를 행하여 모든 덕을 쌓는 외행정의(外行正義)의 공부를 강조하고 있다. 이는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일원상의 진리를 내면화하는 동시에 실천하여 인류가 혜복 충만한 진리세계에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함이다.    

오늘날 칼 마르크스의 경제적 정의론을 비롯해 법률, 정치, 국제관계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정의론이 끊임없이 대두되고 있다. 그 논의들이 진리와 양심을 관통하는 정의의 취사력에 기반한다면 더욱 견고한 내실을 이루어 인류에게 실질적인 유익을 가져다 줄 것이다.

/원광대학교

[2018년 1월 2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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