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원익선 교무] 영화 '세븐'은 가톨릭에서 말하는 탐식, 탐욕, 나태, 욕정, 교만, 시기, 분노의 7가지 근원적인 죄악을 상징하는 살인을 저지른 흉악범을 좇는 스릴러물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주연인 브래드 피트가 분장한 형사 데이빗 밀스가 자신의 부인을 살해한 살인범 존 도우를 죽임으로써 마침내 7번째 분노의 죄악이 완성된다. 

자신과 타인을 죄악의 도구로 사용하고자 한 잔인한 범인은 인간의 모순과 부조리를 비웃는 것 같다. 영화는 사회적 정의는 승리하지만 업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를 보여주는 듯하다. 불신·탐욕·나태·우 또한 정도는 달라도 빠지기 쉬운 인간 자신이 만든 경계이다. 

불신은 도의 문고리를 잡지 못한 것과 같다. 무명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믿음은 도를 이루는 데에 결정력과 추진력을 주며, 성공과 회향의 기쁨을 낳는다. 불신은 개인만이 아니라 사회도 불행을 낳는 원인이 된다. 불신사회라는 말은 상생이 아닌 상극으로 뒤덮인 사회를 말한다.

삼대력을 기르는 삼학공부는 자신의 인격만이 아니라 세계 전체의 인격이 향상되는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 정의와 평화의 세계를 이루는 길은 개개인의 진리에 대한 믿음이 근본이며, 그 믿음이 대사회적 사사불공의 행위로 실천될 때 완성된다.      

탐욕은 '나'를 향한 에고에서 발생한다. 나를 증폭시키기 위한 소유를 통해 탐욕은 확대된다. 단테는 이를 '필요한 것보다 더 소유하려는 욕구'라고 한다. 이 말은 상도에서 벗어나서 과히 취함을 말한다는 뜻과 통한다.

그는 탐욕을 자신의 소유를 쌓아놓고 다른 사람과 나누려고 하지 않는 축재, 물질과 재화를 흥청망청 소비하는 탕진의 두 가지로 보았다. 오늘날 세계는 자본주의의 욕망이 무한질주하고 있다. 이 폭주가 멈추지 않는다면 이미 한계를 넘어선 지구의 보존은 기대하기 어렵다.

삼학수행으로 각자 지구와 인류 전체를 생각하고 활동하는 대아(大我)로의 전환이 시급하다.

나태는 정신과 육신이 게으르고 의욕이 없음을 말한다. 결정한 모든 일이 미완성으로 끝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반복되는 작심삼일은 목표성취에 대한 의지가 결여되어 있을 뿐만이 아니라 어두운 마음으로 갈피를 잡지 못하는 미망에 덮여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밖의 희망을 향해 자신을 환기시켜야 한다. 〈성경〉의 잠언에서는 "게으름은 죄악이다. 게으른 자의 길은 가시 울타리 같으나 정직한 자의 길은 대로니라"라고 한다. 삶의 정반대는 죽음이 아니라 이 게으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바로 이 순간' 단 한 번의 인연이 일어나는 일기일회(一期一回)의 절대적이며 신비한 세계가 눈앞에 펼쳐져 있음을 체득해야 한다.  

우(愚)는 어리석음으로 사리연구에 어두워 자행자지하는 것이다. 원인은 밝음의 반대인 무명이다. 누구나 많은 세월을 소비하고 나서야 자각한다. 더욱이 삶의 종착역에 이르러서야 그 때 최선을 다 하지 못했음을 후회한다.

그 이유는 자신의 열린 품만큼만 살았기 때문이다. 삼학의 빛은 마음을 밝혀 활짝 열어준다. 그리고 대자연의 기운을 타고 진급하는 '임운등등 무애자재'의 불보살의 길로 이끌어 준다.

지혜로써, 함께 사는 이 세계가 밝아진다는 뜻의 '문명(文明)'은 인류 모두가 어리석음에서 해방된 개벽세상을 말한다.

/원광대학교

[2018년 2월 2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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