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원익선 교무] 무엇을 돌릴 것인가. 무명을 밝은 지혜로 돌리는 일이다. 그리고 무거운 업장을 가볍게, 흔쾌하게 받아 넘기는 것이다. 스포츠의 고수들을 생각해보라. 험악한 바위산을 줄 하나로 즐겁게 타고 넘는 등반가는 점점 난이도가 높은 산을 정복하고 싶어 한다.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는 것을 즐긴다. 거대한 파도를 서핑보드 하나로 신나게 즐기는 서퍼들에게 세차게 일렁이는 파도는 가슴을 설레게 한다. 

인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운명이 집채만한 파도로 덮쳐올 때, 공부인들은 그 삶을 즐길 줄 안다. 올림픽의 최고봉에 오른 선수들이 모든 과정에서 그랬듯이 실패나 시행착오를 즐겁게 겪으며 날로 새로워지는 삶을 만끽한다. 여유있게 업장을 객관화하는 힘을 쌓는다.

우리가 공부하는 까닭은 프로 중의 프로인 삶의 프로가 되기 위한 것이다. 프로는 돌리는 공부에 능한 사람이다. 예고도 없이 다가오는 업력이야말로 자신을 성숙시키는 도약의 과정임을 즉각적으로 알아차린다. 

일상수행의 요법은 이처럼 업을 승화시키는 길이다. 그리고 공부인은 더불어 사는 사회 속에서 마음공부의 외연을 더욱 확장시킨다. 인류는 문명의 발달로 무지로부터 벗어난 것 같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여전히 집단무명에 갇혀 있다. 사은은 물론 사요가 사회윤리로 확산될 필요가 여기에 있다.

최근 미투운동에서 보듯이 마음공부는 자신을 위해서나 주위를 위해서도 중요한 덕목이다. 이 문제의 원인은 개인과 개인을 묶는 사회적 권력관계에 있다. 즉 대부분 위계에 의한 권력의 일탈을 대중이 묵인한 공업(公業)의 결과인 것이다.

극복하는 길은 이웃과의 절대적인 은혜 관계를 회복하고, 타자를 부처로서 존중하는 자세를 갖추는 일이다. 나의 이웃은 나의 존재가 그렇듯이 법신불 진리의 화현이자 존재 자체로서 은혜의 보고(寶庫)임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상대를 욕망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내가 그렇게 대접받고 싶듯이 살아있는 부처로서의 권능을 인정해야 한다. 이것을 사사불공의 황금률이라고 불러도 좋다.  

미투문제만이 아니라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난제를 만난다. 예를 들어, 인류는 편리한 삶을 위해 정치, 경제, 문화, 종교 등 모든 영역에서 조직을 만들어 운영한다. 그런데 이 조직은 조직 자체를 위해 봉사해야 하는 조직의 논리를 낳는다. 그 결과, 조직 내에 새로운 형태의 폭력이 발생한다.

또 하나는 윤리학자 라인홀드 니버가 연구한 것으로 개인으로서의 선택은 도덕적이지만, 집단의 일원으로서의 선택은 비도덕적이라는 역설이다. 양심의 이중성이라고도 해야 하는 것으로 집단이기주의의 테두리를 넘어서지 못하는 현상이다.

마지막으로는 항상 자신은 옳다고 주장하면서도 전체의 대의를 위해 타인과 화합하지 못하는 한계이다. 공익을 위해 대학을 만들었는데 학과마다 구성원들이 서로 분열된 것을 보고 한탄했다는 어느 대학 이사장의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러한 부조리와 불의를 제거하고, 화목·화합하기 위한 노력이 사회 불공이다. 사요 실천은 사회 불공의 핵심이다. 사요는 집단적 무명을 인류 전체를 위한 지혜로 돌리는 사회불공이다. 여기에 이웃과 이웃 공동체를 향한 자비심을 무한히 확장하는 자애(慈愛)의 마음공부가 함께 이뤄진다면 인류의 삶은 더욱 행복해 질 것이다. 

/원광대학교

[2018년 3월 2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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