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다니고 있는 직장에서 한 인턴친구를 만났다. 어느날 그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가 원불교에 다닌다는 사실을 알고는 눈이 똥그래졌다. 

그 친구의 부모님도 원불교 교도였고, 자신도 어릴 때부터 교당에 다녔다고 했다. 하지만 잠시 학업 때문에 못다니다가 다시 법회에 나갔을 때에는 친구들이 없어서 점차 멀어졌다고 했다. 그러면서 "원불교가 종교라고 말하고 다니는 사람은 처음봤다"며 아예 원불교를 잘 모르는 사람과는 또 다른 시각으로 나를 바라봤다.

원불교 교도임에도 불구하고 같은 종교를 가진 나를 신기하게 볼 정도로 청년교도가 귀하고, 청년교화가 많이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년교화의 어려움을 외치는 것은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오랫동안 절실한 문제였던 만큼이나 무엇이 문제인지 원인과 비판을 하지 않아 못 풀어왔던 문제도 아닐 것이다. 다만 이 친구를 계기로 나 역시 어쩌다가 원불교 청년교화가 이렇게까지 오게 되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게 됐다.

한창 청년교화가 잘 되었던 시절과 비교했을 때 지금 교화 상황이 달라진 점을 꼽는다면 정보를 얻는 환경이 예전과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한때는 종이신문을 던지는 소리가 새벽을 알리는 소리였지만, 지금은 그 자리를 대신해 대부분 인터넷으로 뉴스를 접하고 다양한 정보를 검색한다. 한창 전성기를 누렸던 라디오도 이제는 그 매력을 잃고 각종 IT매체들이 생활의 대부분을 자리매김했다. 

정보가 귀하고 구하기 쉽지 않았던 시절에는 종교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 매우 유익한 고급정보와 삶의 지혜를 전달해주는 큰 매개체였다. 그러나 이제는 굳이 종교를 갖지 않아도 각종 동영상이나 SNS, 인터넷 등 다양한 매체에서 핵심만 추려 나에게 필요한 정보만 골라 습득할 수 있는 세상이 됐다. 이런 세상에서 종교의 매력지수가 앞으로도 높게 유지될 수 있을까.

물론 그렇다고 종교의 라이벌이 TV나 인터넷 같은 정보매체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과거에 사람들에게 고급정보와 지혜를 실생활에서 구현할 수 있는 역할을 종교를 통해 가능했지만, 미래로 나아갈수록 이러한 것들을 구하기 위해 종교를 찾는 사람의 숫자는 적어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가끔 교당에 가면 일제히 단상을 바라보며 줄줄이 놓여있는 의자와 이를 내려다보는 설교석상을 보면 왠지 정보의 흐름이 일방통행인 듯한 인상을 받곤 한다. 서로의 소통속에서 정보 교환을 이뤄지고, 그 속에서 검증받은 것들일수록 높은 가치를 드러내는 세상과 사회 일련의 흐름을 바라보면서 교당도 무언가 변화가 필요하다는 감상이 들었다.

일방적 소통보다는 양방향의 소통으로, 또 IT매체에서는 할 수 없는 실생활에 직접 필요한 지혜를 실질적으로 단련해 줄 수 있는 장으로써 교당의 역할이 지금보다 더 커졌으면 하는 것이다.

내가 이 공부를 끊임없이 해야하는 이유를 알고, 일어나는 마음을 대조하고 또 대조하여 삶 속에서 펼쳐나갈 때, 대종사가 만들어 준 이 법을 가장 멋지게 쓰는 길이 아닐까. 교단에서도 청년들이 법을 삶 속으로 녹여낼 수 있도록 고민을 함께 해나가길 기대한다.

/행아웃교화단, 노은교당

[2018년 4월 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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