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박성은 교무.

[원불교신문=한지선 작가] 연둣빛 잎사귀들이 새로록 돋는 사월이었다. 나는 불현듯 할머니가 보고 싶어서 옛집으로 달려왔다. 고요하고 오래 된 동네의 맨 앞에 자리한 할머니의 옛집 마당에도 꽃을 다 떨군 벚나무 한 그루가 초록잎을 피워내고 있었다.

매봉재 아래 일가를 이루고 몇 발짝 걸으면 닿던 교당에 어린 손녀의 손을 잡고 오가던 할머니. 할머니의 묘는 바로 할머니와 어머니, 아버지가 살던 옛집 옆 소나무 숲에 있었다. 
어느 날 할머니는 꿈 이야기를 들러주었다.

"이상한 꿈을 꾸었지 뭐냐. 매봉재 아래를 지나가는데 스님 다섯 명이 모여서 시끄럽게 회의를 하고 있더라. 스님 한 분이 어딘가를 가리키며 저기가 좋겠소, 하니 모두가 반대하였고, 다른 스님 한 분이 다른 곳을 가리키며 그럼 저기가 좋겠소, 하니 모두 좋다고 하며 그쪽으로 내려갔다."

꿈에서 깨어나 생각해보니 "그곳이 지금의 화해교당 자리였고, 그 후에 그 자리에 교당이 생겼단다"는 이야기였다.

할머니는 일찍이 영몽을 꾸신 것이 틀림없다. 집안의 큰 어른이셨고 혜안을 지니셨던 우리 할머니와 살던 옛집을 찾을 때마다 나는 은연중 그 꿈 이야기를 떠올리게 되었다.
꿈인 듯 아닌 듯한 할머니 이야기 속에서 나는 화해리의 먼 성스런 전설 속으로 날아 들어간다.


해질녘이었다. 찬란한 햇살이 서쪽으로 기울면서 마당이 금빛으로 빛나기 시작했고, 사월의 공기는 맑고 달콤했다.

열아홉 살 청년 성자는 마당을 서성이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쩌면 하루 종일 마당가를 서성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오래 전부터 기다려 온 누군가가 오늘 올 것이다. 

그때 금빛 휘광을 펄럭이며 누군가 마당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그였다. 어린 성자가 기다리던 그 사람. 더 큰 성자. 성자는 열아홉 살이었고 더 큰 성자는 스물여덟이었다. 그들은 서로를 알아보았다. 

'나는 당신을 기다렸어요.'
'나는 너를 만나러 왔노라.'
그들은 석양이 금빛으로 빛나는 마당에 서서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온 세상이 숨을 죽이고, 금빛만이 찬란했다. 고요한 공기를 가르며 큰 성자가 말했다. 

"그대는 그동안 나를 찾으려고 얼마나 고심하였는가."

성자는 감격하여 말했다.

"저 역시 큰 원을 품고 수년 동안 수백 리를 정처 없이 방황하여 왔으나 오늘에야 영겁 대사를 해결할 날이 왔습니다."

성자는  더 큰 성자에게 큰절을 올렸다. 우뚝 서 있는 더 큰 성자의 두루마기 뒤로 금빛 휘광이 너울거렸다. 그곳은 정읍 땅 화해리 김해운의 집 마당이었다.

원기3년 무오 4월, 팔산 대봉도를 데리고 소태산 대종사 몸소 오시어 정산종사와 제우하신 곳 화해리. 천지공사를 한 역사적인 땅 화해리. *원기3년 4월 이루어진 두 성자의 만남은 천지공사였다.

원기2년 7월경 그는 이 회상 최초의 단을 조직하여 8인의 단원을 정하고 중앙위를 비워두었다. 그는 먼 곳에 있는 성자에게 소리 없이 말했다.
"너의 자리를 비워두었다." 

먼 곳에 있던 성자는 그 소리를 들었다.
"예."

성자는 그 큰 성자의 소리를 듣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예견된 만남이었다. 영생의 약속의 땅이며, 숙겁의 인연의 땅에서 마침내 제우하시었으니. 

길룡리 앞 방언공사를 시작할 무렵 소태산은 제자들을 데리고 "우리가 찾던 사람을 찾으러 가자" 하며 옥녀봉 중턱에 올라 천기를 살폈다. 
"그 사람이 멀리 있지 않다."

원기3년 음력 3월 말, 그는 김광선과 함께 무장, 고창을 거쳐 백이십 리의 먼 길을 걸어 정읍 화해리에 당도하였다.
후에 성자가 더 큰 성자를 따라 영산으로 가서 중앙위에 오른 후 그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일찍이 내가 경상도에서 구도할 때 간혹 눈을 감으면 원만하신 용모의 큰 스승님과 고요한 해변의 풍경이 눈앞에 떠오르더니 대종사를 영산에서 만나 뵈오니 그때 떠오르던 그 어른이 대종사요 그 강산이 영산이더라."

김해운은 모악산에 있던 달덩이 같은 용모의 어린 성자를 모시고 자신의 집으로 왔고, 성자는 그곳에서 일곱 달 동안 머물며 뒷산 매봉재에 올라 기도하면서 멀리서 올 그를 기다렸다.
…화해리는 소태산 대종사와 정산종사께서 뜻깊은 제우로 새 회상 창건의 추기를 이룩하신 거룩한 땅… 대종사 2박하신 객사터와 정산종사 머무시던 집터 어간의 정자나무 아래 이 비를 세우노니 그 이름 뜻 깊은 우담발화 꽃바다여 그 향기 억만년 무궁하고 그윽하다.

할머니는 오래 전 돌아가셨다. 나는 할머니의 땅 화해리에 와서 백 년 전의 위대한 만남에 대한 이야기가 새겨진 제우지비의 비문을 읽는다. 비문의 마지막 구절은 눈물나게 아름답고 숭고하였다. 우담발화 꽃바다여 그 향기 억만년 무궁하고 그윽하다….

비문의 마지막 구절을 쓰다듬듯 읽어보고 화해교당의 옆을 지나 매봉재를 향해 걷는다. 

인기척 없는 동네 길을 올라 숲에 들어서니 바람이 조용히 뒤따라왔다. 햇빛은 백 년 전 그날처럼 금빛으로 빛나고 새들은 재잘대며 숲 위를 난다.

나는 할머니가 무척 보고 싶었다. 
'할머니, 매봉재를 오르고 있어요.'

뒤돌아보니 사월의 햇빛이 찬란했다. 저절로 눈이 감겼다. 

"눈을 감고 숲길에 멈춰 서서 들어봐라. 무슨 소리가 나지 않느냐?" 마치 할머니가 속삭이는 것 같았지만 모르는 목소리가 먼 곳에서인 듯 들려왔고, 나는 잠시 눈을 감고 그림을 그리듯 그들을 응시했다. 가슴이 터억 막혔다.

석양의 찬란한 금빛으로 가득 찬 마당에서 서로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 그 두 사람은 곧 마당을 나서 성자가 기도하곤 하던 매봉재를 향해 걷기 시작한다. 고즈넉한 소나무 숲 사잇길을 지나 언덕을 오르고. 석양은 애잔하게 금빛을 흩뿌리며 두 사람의 뒤를 따라간다. 새들이 푸드득 날아가고 바람도 숨을 죽였다. 

*물질문명이 편만한 이 시대의 주세불로 오신 소태산과 주세불을 동행한 어른 정산종사의 역사적인 만남의 땅. 새 회상 창건의 추기를 이룩하신 거룩한 땅. 

'할머니. 이곳에 왔어요. '
키 높은 소나무들로 둘러싸인 매봉재가 보였다. 비단자락이 사각이듯 소리 없이 선회하는 백 년 전 그 약속들이 고요한 바람처럼 스쳐갔다.  

나는 두런두런 회의를 하고 있는 다섯 명의 스님들과 그들을 지긋이 내려다보며 웃고 있는 두루마기를 입은 두 명의 젊은 성자들을 보았다. 온 산이 금빛으로 가득 찼다. 

※ 문산 김정용 종사의 설법 중에서 두 성자의 만남의 의미를 극대화하고자 만남을 기점으로 하여 과거로 거슬러가는 스토리형태를 취했다. 


 

 

 

 

 

 

 

 

 

 

한지선 작가는 정읍에서 태어나 전주교육대학을 졸업하고 대학도서관 사서로 일했다. 저서로는 장편소설 〈그녀는 강을 따라갔다〉, 〈여름비 지나간 후〉, 소설집 〈그때 깊은 밤에〉가 있고, 공동집필 테마소설집 〈두 번 결혼할 법〉, 〈마지막 식사〉가 있다. 제1회 전북소설문학상과 제2회 작가의눈 작품상을 수상했다.

[2018년 4월 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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