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이진수 교무] 빅토리아 시대의 만병통치약이었던 홍차는 영국인의 삶과 취향을 변화시킨 대표적인 음료이자 영국을 홍차의 나라로 만든 수식어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포르투갈의 공주 캐서린이 시집 오면서 가져온 차가 왕족과 귀족의 전유물에서 국민음료로 탈바꿈 할 수 있었던 것은 빅토리아 여왕(1837~1901)의 공적이 크다. 

1837년에 트와이닝을 공식 업체로 지정한 빅토리아 여왕의 차생활과 적극적인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1838년에는 여왕의 일과가 차 한 잔을 곁들여 타임지를 읽으면서 통치를 시작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빅토리아 여왕의 일기를 통해 식사시간과 공간을 알 수 있는데, 당시의 티타임은 브랙퍼스트·런천·티·디너·서퍼로 구분됐다. 즉위 50년에는 다이닝룸·차이니즈룸·서퍼룸 등에서 식사를 하며 차를 마신 이야기가 기록됐음을 볼 때 일상적으로 차를 마신 것을 알 수 있다. 

빅토리아 여왕의 공주시절의 교육방침은 토마스 아놀드(Thomas Arnold), 엘리자베스 애플턴(Elizabeth Appleton), 한나 모어(Hannah More)의 교육원리에 영향을 받았다. 여왕은 항상 왕족으로서의 위엄을 지키며 국민들이 편안함을 느낄 수 있게 해줬다. 

단란한 가정의 표상이었던 여왕의 아홉자매와 부군인 알버트공이 있었기 때문이다. 행복한 가정은 크리스마스를 통해 형성됐고 빅토리아 여왕시대에 부활한 크리스마스는 각 교파마다 노동자와 빈민가를 위한 티타임이 생겨났다. 여왕이 자선단체의 후원을 받아 설립한 티 모럴리티(Tea Moralities)는 빅토리아 여왕이 음주를 예방하기 위해 차를 마시게끔 적극적인 계몽 활동에 앞장선 단체로 극빈자, 실업자, 무주택자와 윤락녀들을 모이게 했으며, 알코올의 폐해에 대해 알렸다. 

당시에 물을 정화하거나 우유를 저온 살균하는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영국인들은 온갖 종류의 박테리아에 노출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로 인한 문제는 농촌보다는 대도시를 중심으로 더 심각할 수밖에 없었다. 대도시 중심의 인구증가로 런던의 식수는 더 심각했고 술보다 더 위험한 물을 피해 영국인들이 마실 수밖에 없었던 절대적인 음료는 바로 맥주와 에일(Ale)이었다. 이것은 약간의 살균 효과가 있었고, 또 약간의 영양을 섭취하는데 도움을 줬기 때문이다.

홍차의 나라 수식어를 붙게 한 영국 빅토리아 여왕.

모든 영국인들의 일상에 빠지지 않는 술은 하루의 시작과 끝을 알리게 됐고, 술로 인한 병폐는 사회 곳곳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물을 대신해 마신 술로 인해 노동자들은 일에 집중하기 힘들었고, 17세기 네덜란드에서 개발된 진(Jin)은 맥주와 에일을 넘어선 아주 강력한 술이었다. 

당시 수입된 진은 아주 비싼 가격이었지만 영국 증류주 생산자들에 의해 개발된 싼값의 진(순수 증류주에 물과 설탕, 과일즙을 첨가)으로 인해 런던 빈민가를 중심으로 퍼져 나갔다. 당시 진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빈민거리는 윌리엄 호가스(Jin Lain, 1751)의 판화에서 잘 표현되고 있다. 차는 당시 술독에 빠진 영국인들이 오염된 물과 술독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준 유일한 치료제였고, 산업혁명으로 인한 노동자들의 에너지 공급원으로 더 없이 건강한 음료였다. 

1834년 5월14일 공포된 절대금주 서약서는 바로 따뜻한 차 한 잔의 위력이 아닐 수 없다. 

당시 모닝 티 브레이크(Moring Tea Break)는 빅토리아 여왕의 적극적인 차 마시기 계몽활동에서 이뤄진 것이다. 1886년에는 리즈웨이사(RIDGWAYS)에서 빅토리아 여왕을 위해 특별히 블렌딩한 로얄블렌드 H.M.B(Her Majesty Blend)는 여왕을 위한 최초의 블렌딩 티이자 왕실 전용 블렌딩티라는 점에서 당시 여왕의 차생활을 엿볼 수 있다. 리즈웨이의 블렌딩티는 당시부터 지금까지 고품질을 유지하는 엄격한 관리로 같은 제품이 출시되고 있다.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