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정도성 도무] 대부분의 종교는 교조의 탄신에 맞춰 연호를 시작하지만 원불교의 원기(圓紀)는 소태산 대종사가 태어난 날이 아니라 대각한 날을 기점으로 시작한다.

대종사 탄신일은 오히려 잘 모르고 있을 정도이다. 이것은 큰 의미가 있다. 한 성자가 태어난 날도 그 의미를 가늠할 수 없이 크지만 그 성자가 큰 깨달음을 달성한 날은 인류 문명사의 흐름을 바꿔 놓은 위대한 날이다. 그래서 모두의 육신 생일은 각각 다르지만 대종사 대각의 날을 정신이 새롭게 태어난 날, 우리 정신의 공동 생일로 삼자는 발상은 매우 탁월한 진전이다.

이 지점에서 새삼스럽게 떠오르는 질문이 있다. 대종사는 왜 또 다시 새로운 종교를 열었을까? 관점에 따라서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이유 중 하나는 '희망'이 아닐까 한다. 모든 성자의 탄신과 개교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의 씨앗을 퍼뜨리는 데 있지만 대종사만큼 희망을 명징하게 보여주는 성자는 없을 것이다. 

석가모니불은 카스트제도라는 불평등한 신분제도가 완강한 인도에서 태어나 누구에게나 불성이 있다는 큰 평등사상을 전했다. 공자는 춘추전국시대라는 엄청난 혼란기에 인간의 도리에 대해 설파했다. 예수는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아 고통에 빠진 식민지 민중들의 아픔 가운데 찾아와 죽음으로 사랑을 실천했다. 이 모두가 희망이었다. 대종사도 조선 말기와 일제 치하의 극심한 혼란과 탄압 속에서 신음하는 민중들에게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을 줬다. 말하자면 가장 고통스러운 시대, 희망이 가장 필요한 시대에 와 현실을 뛰어넘을 수 있는 희망을 펼쳐준 것이다. 〈대종경〉 전망품에 그 희망은 구체적으로 담겨 있다. 

"근래 어떤 사람들은 이 세상이 말세가 되어 영영 파멸밖에는 길이 없다고 하나 나는 그렇지 않다고 하노니, 성인의 자취가 끊어진 지 오래고 정의 도덕이 희미하여졌으니 말세인 것만은 사실이나, 이 세상이 그대로 파멸되지는 아니하리라. 돌아오는 세상이야말로 참으로 크게 문명한 도덕 세계일 것이니, 그러므로 지금은 묵은 세상의 끝이요, 새 세상의 처음이 되어, 시대의 앞길을 추측하기가 퍽 어려우나 오는 세상의 문명을 추측하는 사람이야 어찌 든든하지 아니하며 즐겁지 아니하리요."(〈대종경〉 전망품 19장)

'시대의 앞길을 추측하기가 퍽 어려우나'와 같이 조심스러운 언급도 했지만 이 만큼 희망적인 말씀이 또 어디 있겠는가. 또한 세계에서 가장 불행한 민족이라고 불렸던 당시 조선의 민중에게 금강산 법문은 얼마나 큰 힘이 됐을까. "금강산이 세상에 드러나면 조선이 다시 조선이 된다"는 말씀은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이었지만 금강산이 드러나는 세상, 이 땅이 평화의 상징으로 드러나는 세상, '크게 문명한 도덕 세계'를 예견한 것이다. 게다가 '정신적 방면으로는 장차 세계 여러 나라 가운데 제일 가는 지도국'(전망품 23장)이 될 것이라는 전망은 희망의 극점에 있다. 

원불교는 희망의 종교이다. 가장 어두울 때 가장 빛나는 희망을 보여줬다. 희망은 성자의 선물과 같은 것. 오늘날 여전히 시대의 앞길을 추측하기가 어렵기에 더욱 더 이 희망을 가슴에 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원경고등학교

[2018년 5월 2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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