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이혜성 교무] 훈련원에 발령을 받으면서, 어찌 할 수 없이 운전을 시작한 나는 이제 5년차 운전자가 됐다. 운전 첫날, 주유소에서 그 집 창고를 무자비하게 들이받아 피 같은 보험금으로 새 창고를 지어준 이력에 걸맞게 나는 여전히 운전이 무섭다. 다만 익산 시내에서 훈련원 가는 길쯤은 씽씽 달릴 수 있는 운전자가 됐다. 팔봉을 지나 시원하게 뚫린 자동차도로를 씽씽 달리다보면, 어느새 훈련원 앞에 위치한 저수지가 나온다. 해안도로처럼 저수지를 끼고 도는 고불고불한 길을 매끄럽게 달리면 훈련원에 도착한다. 

그런데 오늘, 답답한 장면을 마주했다. 내 앞차가 너무 늦게 간다. 딱 봐도 저 차의 속도는 시속 30km도 안 된다. 이해는 한다. 저 사람들은 분명 나들이 삼아 이곳에 온 것이다. 저수지를 보며 청명한 드라이브를 즐기는 중이리라.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시속 30km도 안 되는 것은 너무 하지 않은가.

외길이라 추월하자니 고불고불한 길의 특성상 위험 구역이 너무 많고, 그냥 뒤따르자니 시속 30km로 주행해야 할 구간이 너무 많이 남았다. 일단 속도를 내서 앞차에 가까이 다가간다. 뒤에 너무 가까이 따라오면, 눈치껏 조금 빨리 가지 않을까? 열심히 뒤따르지만, 백미러를 볼 여가가 없는 운전자인가보다. 운전자 마음은 분명 저수지에 가 있다. 

"안되겠다. 그냥 추월을 해야겠다." 추월을 시도하기 위해, 비상깜빡이를 켜고 반대편 차선을 주시한다. 하지만 반대편엔 덤프트럭들이 추월해 갈 틈을 안주고 씽씽 달려온다. 이건 정말 무섭다. 에잇! 나보고 어찌하라는 말인가. 내 앞의 느림보차여~ 조금만 더 빨리 갈 수는 없냐는 말이다. 내 맘도 모르고 여전히 드라이브를 즐기고 있는 그 차 뒤에서 고구마같은 답답함을 느끼던 나는, 짜증이 일어나는 마음을 살포시 누르며 창문을 연다. 그 찰라 내 얼굴에 부딪히는 시원한 바람! 그러고 보니 오늘따라 저수지 물도 반짝반짝 예쁘구나. 

"그러게! 나는 왜 드라이브하는 사람들처럼 청량한 기분으로 느긋하게 이 길을 지나가지 못할까." 나도 훈련원에서 살기 전에는 분명 그렇지 않았다. 같은 길, 다른 마음이다. 반복되는 일, 일상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정산종사는 "불보살들은 전심(前心)과 후심(後心)이 한결 같아서 불보살이 되었으나, 범부들은 처음 발심과는 달리 경계를 따라 그 마음이 흔들려 퇴보하므로 성공을 보지 못하나니, 그대들은 언제나 도 즐기는 마음과 공을 위하는 마음으로 전심과 후심이 한결 같게 하라"고 법문했다.(〈정산종사법어〉 권도편 20장) 

전의 마음과 후의 마음이 한결같다는 것은, 늘 '처음의 마음'으로 깨어있으라는 뜻이 아닐까. 처음에는 소중히 여기던 광경도 나중엔 단지 배경이 되어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한다. 나아가 처음에는 감사했던 것들이 나중엔 당연한 일이 되고, 처음에는 조심했던 마음이 나중엔 함부로 대하는 마음도 된다.

처음 꽃 같았던 발심이 일상에 매몰돼 공부심은 찾아볼 수 없게 되기도 한다. 처음의 마음과 나중의 마음을 한결 같게 하자. 지금 이 순간, 익숙함과 결별하고 처음의 마음이 되니 답답했던 그 길이 이제 상쾌한 드라이브코스가 된다.

/중앙중도훈련원

[2018년 5월 2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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