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이혜성 교무] 알람이 울린다. 알람을 끈다. 알람이 또 울린다. 또 끈다. 새벽 5시, 좌선 나갈 시간이다. 그런데, 눈이 떠지지 않는다. 이는 훈련의 후유증이다. 일주일 내 뛰어다닌 터라 삭신이 쑤시다. 오늘 좌선은 쉬자. 못 일어나겠다. 그런데, 어떤 냉정한 여자가 내 안에서 튀어나와 말한다. '좌선 못 갈 만큼 피곤해? 어제 일찍 누웠잖아. 피곤하다는 관념에 속는 거야.' 

물론, 오래 누워있긴 했다. 하지만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며칠 목이 끊어질 듯 아프더니, 어제 밤에는 감기기운이 몰려왔다. 콜록거리느라 여러 번 깼다. 또 감기가 완전히 들어오면 이후의 훈련일정에 지장이 생긴다. 민폐를 끼치느니, 컨디션 조절을 하는 게 맞다. 그 냉정한 여자가 또 '너 밤새 기침하긴 했지. 근데, 새벽 좌선 안 나가는 것과 컨디션 조절은 무슨 관련이니? 좌선만 안 나가면 컨디션이 돌아오니?' 아니, 이렇게 안 좋은 몸 상태로는 좌선을 제대로 할 수도 없다.

출석에만 의의를 두는 것도 집착이다. 그 여자가 또 반박한다. '일단 해보고, 정 안 좋으면 들어와도 되는데. 넌 지금 그냥 나가기가 싫은 거잖아.' 그쯤 되니 저항이 버럭 생긴다. 야, 솔직히 나 좌선 잘 안 빠지잖아! 한번쯤 빠지는 것이 뭐 어떠냐? '넌 누가 보라고 좌선 하니? 지금껏 빠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왜 중요하지?' 아! 졌다. 벌떡 일어난다. 

좌선 나가는 길,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다. 의식 너머 잠결에 두 여자가 치열했다. '좌선 가기 싫은 나'와 '좌선을 내보내려는 나'의 열띤 논쟁. 그런데 돌아보면 '좌선 가기 싫은 나'의 논리도 매우 합리적이다. '좌선을 내보내려는 나'의 조금 더 우세한 내공이 아니었으면, 깜빡 설득당할 뻔 했다. 속지 않았다는 사실에 뿌듯한 마음이 일어나는 찰나, 며칠 전 일이 떠오른다. 피치 못하게 좌선을 못 나갔다던 도반에게 내가 한 말이다.

"못 나간 것 아니야. '안' 나간 거지. 새벽 잠결에 알람 소리를 들었는데도 안 나왔으면, 그건 안 나가기를 선택 한 거야. 그러니 못 나갔다고는 하지마. 나올 마음만 있으면, 기어서라도 나오지. 다 핑계고 자기합리화야." 이 얼마나 시크하고 냉철한 판단이란 말인가. 그런데, 나 참 이율배반적이다. 타인의 행동을 판단할 때는 이렇게 명확하면서, 나의 일에 다다르면 왜 이렇게 치열해진단 말인가. 

정산종사는 "사람이 남의 일을 볼 때에는 아무것도 거리낌이 없으므로 그 장단과 고저를 바로 비춰 볼 수 있사오나, 제가 저를 볼 때에는 항상 나라는 상(相)이 가운데 있어서 그 그림자가 지혜 광명을 덮으므로 그 시비를 제대로 알지 못하나이다." (〈대종경〉 수행품 26장) 말씀했다. 

'내가 하면 로맨스'다. 남의 일을 볼 때에는 옳고 그름을 바르게 볼 수 있다. 그런데, 나의 일을 볼 때는 늘 '이유'가 많다. '사연'도 많다. 그 '이유'들로 인해 내가 나에게 완전히 속기도 한다. 어느 땐 속았는지조차 모른다. 남의 일에는 이다지 냉철하면서 말이다. 나 지금, '나'라는 것에 속고 있는가, 냉정한 정신으로 돌아봐야겠다. 남에게 '잘못'이라고 말하려면, 내가 하는 것도 '잘못'이라고 말할 수 있는. 눈을 똑바로 뜬 관조가 필요한 시점이다. 

/중앙중도훈련원

[2018년 6월2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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