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원익선 교무] 천도재를 지낼 때 영가에게 염불 7편을 올리며, '완전한 해탈천도와 왕생극락'을 기원한다. 필자도 일상심고에서 "이 지하와 지상과 우주에 가득 찬 유주무주 고혼들의 완전한 해탈천도와 왕생극락을 기원하옵나니 굽어 살펴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한다. 그렇다면 과연 극락정토는 실재하는가.

일본에서 불교학을 가르쳐준 은사 한 분이 얼마 전 내게 이런 말씀을 해줬다.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아서 그런지 생각하면 할수록 극락정토가 존재한다는 확신이 든다고. 이 분은 수업시간에도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그리고 그러한 극락정토가 실재하지 않는다면 무상한 우리 삶은 무의미하다고 한다. 나는 순간 "아, 이 분은 아미타불에 대한 믿음을 보여주는구나"라고 생각했다.  

대승불교의 한 축인 정토신앙은 믿음을 기반으로 한다. 특히 <무량수경>에서는 온갖 부정한 것으로 오염된 예토(穢土)에서 사후에 깨끗하고 안락한 정토세계로 가고 싶은 중생들의 희망을 법장비구가 구현한다. 조사들은 48원 가운데, 중생들이 부처가 된 자신의 이름을 불러 극락왕생할 수 없다면 법장비구 스스로 부처를 이루지 않겠다고 발원한 제18원을 으뜸으로 친다. 결국 아미타불이 됐고, 중생들은 오직 염불 하나면 왕생극락할 수 있는 자격이 생겼다. 기독교 신앙과 비교 가능한 불교의 믿음이 매우 구체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극락정토가 존재한다는 은사님의 말씀은 이 신화를 마음 깊이 받아들이고, 그 세계를 관념이 아닌 실재로써 인식한다는 점을 뜻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존재를 증명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다. 유심정토의 원리 또한 마음이 곧 정토이며, 어디에든 정토를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의 믿음만큼 그것은 실재한다. 

종재 축원문에는 "오늘 이 49일은 열반인 ○○의 중음을 옮기는 중요한 기일이 되온 바, 아직 수행력이 부족한 중생계에 있어서 어찌 그 천업을 자력으로써 돌파할 수 있사오리까"라고 하며, 부처님의 가호를 빈다. 그 절차는 중음→악도윤회(×)→불토낙지→성불제중이다. 중음을 지나 바로 불토낙지로 돌아와 성불제중의 대과를 이루길 염원하는 것은 영가가 중음에서 깨침을 얻거나 한 번은 정토극락에 가서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일단 부처가 되어 이 세상에 돌아오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는 아미타불에 대한 믿음의 구조와 거의 같다. 이 사바세계가 불토낙지가 되기 위해서는 영가 스스로 깨달음을 얻고 부처가 되어 이 세계를 불토낙지로 만들어야 가능하다. 그런데 타력을 간절히 원하는 것은 자력 없는 중생이 부처님의 가피로 부처가 되기를 바라는 기원이다. 결국 영가가 깊은 믿음에 의지해야만 자신은 물론 이웃 모두가 불과를 성취하는 길로 들어설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토교학이 전통적으로 성도문과 정토문, 난행도와 이행도, 자력문과 타력문을 세우고, 범부가 아미타불의 정토에 가는 것을 왕상회향(往相回向), 그 정토에서 예토로 돌아오는 것을 환상회향(還相回向)이라고 설하는 까닭은 대승불교의 자리이타 정신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말법시대에 깨달음을 얻을 수 없는 중생들에게는 믿음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정토의 가르침을 우리가 받아들일 이유가 여기에 있다.  

/원광대학교

[2018년 7월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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