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이혜셩 교무] 월초기도 날 아침. 사용 할 장소를 청소하러 가는 교무와 딱 마주친다. 내가 의기양양하게 말한다. "내가 어제 거기 청소했어요. 깨끗할 테니, 청소 안 해도 돼요." 그 교무는 고맙다고, 언제 조용히 청소했냐며 반색한다. 딱히 청소를 미리 해둘 생각은 없었다. 다만 바닥의 먼지들이 눈에 보였을 뿐이다. 보이지 않았으면 몰라도, 보이는 먼지를 닦지 않을 수 없다. 

그 교무 역시 그 곳 청소담당은 아니지만, 손이 빈 곳을 조용히 찾아 청소하려던 찰나임을 잘 알기에 우린 서로를 보며 조용히 웃었다. 매번 꼭 필요한 곳을 찾아 청소해주는 교무에게 도움이 됐다 생각하니 기뻤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이 이야기가 여기서 마쳤으면 좋았으련만, 결과가 그리 평화롭지 못하다. 뒤이은 월초기도 시간. 입정을 마치고 눈을 떴는데, 저 앞에 작은 먼지덩이 하나가 눈에 보인다.

'아! 내가 청소했는데! 내가 깨끗할 거라고 장담 했는데, 이게 웬일인가. 청소하러 가는 교무님을 만류하면서 까지 '내가 했다'고 했는데, 그 교무님은 저 먼지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얼굴이 화끈거린다. 나를 믿은 것을 후회할까. 그 교무도 왠지 지금 이 순간, 저 먼지덩이를 보고 있을 것 같다. 다들 조용히 앉아 있는 시간에, 일어나서 먼지를 치워버릴 수도 없고. 바닥의 먼지덩이가 야속하다. 기도문을 읽을 때도, 4배를 할 때도 내 눈엔 먼지덩이만 보인다. 저 먼지덩이가 나의 과실인 것 같아서, 꼭 나의 치부 같아서 매우 불편하다. 그 순간 하나의 자각이 온다. 

'너 뭐하니? 지금 기도시간이잖아.' 먼지덩이 하나에 기도는 나 몰라라 하고 생각이 온통 먼지덩이에 가 있다. 나는 왜 이렇게 저 먼지가 신경 쓰일까. 결국, 나의 과실을 스스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 결국, 그 교무에게 나의 과실을 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 청소를 잘못하고도 잘한 것처럼 보이고 싶은 마음이다. 거짓말도 이런 거짓말이 어디 있는가. 중요한 것은, 이미 먼지덩이는 그곳에 있다는 사실이고, 나는 내 과실을 그냥 인정하면 된다. '내가 청소를 제대로 못했다'는 생각, 과실을 없던 것으로 만들려는 욕심을 버리면 된다. 상대가 어떻게 생각할지 괘념치 않으면 된다. 그리곤, 다음엔 청소를 더 잘하면 된다. 

소태산 대종사는 "지혜 있는 사람은 지위의 고하를 가리지 않고 거짓 없이 그 일에만 충실하므로, 시일이 갈수록 그 일과 공덕이 찬란하게 드러나고, 어리석은 사람은 그 일에는 충실하지 아니하면서 이름과 공만을 구하므로, 결국 이름과 공이 헛되이 없어지고 마나니라"고 법문했다. (〈대종경〉 요훈품 22장)

충실하지 않았으면서도, 타인의 인정을 받기 바라고, 또 충실하지 않았다는 그 사실은 숨기고 싶어 한다. 혹 누가 드러내려하면 그 사람을 원수처럼 미워하기도 한다. 결국 충실하지 못했던 '내 행동의 결과'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어리석음이다. 나의 과실을 내가 담담한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용기, 그 용기 하나가 결국 그 일을 다시금 성공하게 하는 시작점이 되지 않을까. 실수해도 괜찮다. 실수하는 나도 괜찮다. 실수가 반복되지 않게 노력하면 그뿐이다. 거짓은 결국 무너진다.

/중앙중도훈련원

[2018년 7월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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