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인 / 을지로 터줏대감 '영랍빠' 강희영 대표
10년 다닌 회사 나와 평생 기술 배워
공업용미싱 부품 랍빠 제작 39년, 초심 지킨 세월

[원불교신문=민소연 기자] 대한민국 모든 기술들이 다 나고 자란다는 서울 중구 을지로는 '사람 빼고 못 만드는 게 없다'는 대한민국 제조업의 산실이다. 타일골목, 도기골목, 공구골목, 가구골목 등 장르에 따라 거리가 형성돼 있는 을지로. 그 중에서도 미싱간판과 조명간판 사이 낯선 단어 '랍빠'가 눈에 띄는 을지로4가. 가게마다 수십년의 역사와 숱한 이야기가 살아숨쉬는 그곳에서 '영랍빠' 강희영 대표(법명 보은·잠실교당)를 만났다.

정보화니 4차산업이니 해도 여전히 미싱 한번 거치지 않은 웃옷 없고, 손기술 한번 안 들어간  바지도 없다. 옷뿐 아니라 신발, 가방 등 소품, 심지어는 가발 만드는데 까지도 쓰이는 다양한 공업용 미싱. '랍빠'는 바로 이 미싱에 들어가는 모든 종류의 부품을 가리킨다.

"목적이나 모양, 밀리(m) 등에 따라 기계가 다르기도 하고 끼워쓰는 부품이 다르기도 합니다. 종류야 셀 수 없지만, 이제까지 내 손을 거친 것은 300여 가지 정도 될 거예요." 

흔하게는 옷 둘레의 단부터 셔츠의 칼라, 치마 주름, 옷깃이며 접힌 부분까지도 다 랍빠를 거쳐야 제대로 나온다. 그의 랍빠는, 옷감같은 평평한 소재를 굴곡많고 제각각인 사람의 몸에 맞추기 위한 다양한 노하우와 배려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랍빠라는 게 크기는 작고 볼품없어도, 딱 그 자리에서 맞아 들어가야 기계 전체가 돌아가거든요. 딱 바늘 하나 차이로 공장이 문을 열고 닫고 하기에 책임감을 갖고 만듭니다." 

내년이면 40년을 맞는 그의 랍빠인생. 39년 전, 철도신호기 회사에 다니던 그에게 "나이 먹어서도 할 수 있는 기술을 배우면 어떻겠냐"고 매제가 말했다. 세심하고 꼼꼼하며, 안되는 것은 될 때까지 몇 번이고 도전하는 그의 성격을 알기에 나온 제안이었다. 

"10년 다닌 회사를 그만둔다는 게 쉽지 않았죠. 더구나 쌍둥이 딸들 돌무렵이었거든요. 고심 끝에 사표를 내고 나왔는데, '기술 배우러 가고싶다'고 하니 '밥만 줄 테니 와서 배우는 건 알아서 하라'고 하더라고요."

그래도 그의 성실함과 습득력을 높이 산 스승은 괜찮은 대우를 해줬다. 첫달 2만원을 받은 그, 회사 월급 5만원에 턱없이 모자랐지만 허리띠를 졸라매는 아내(최연수 교도)와 함께 차분히 '해뜰날'을 기다렸다 

"매일 아침8시부터 밤11시까지 연습하고 막차 타고 집에 갔어요. 회사 퇴직금을 까먹으며 꼬박 2년을 쏟아부었습니다. 그렇게 '영랍빠'로 독립하고는 눈코뜰새 없이 바빴고 먹고 살만 해졌어요. 수입이 없는 날도 있었지만, 어떨 때는 하루에 3만원도 벌고 5만원도 벌게 되더라고요. 그동안 고생한 아내와 아이들에게 가져다주는 보람으로 살았죠."

초심을 지켜가는 일이야말로 가장 어려우면서도 가장 단순한 정답이라는 그. 유난히 오래 쓴다는 그의 제품, 더구나 그는 '영랍빠' 철인만 찍혀있으면 열 번이고 스무번이고 무상 A/S를 해준다. 문의전화는 낮밤 주말 없이 친절하게 받지만, 반면 여기저기 떠보는 이들과는 아예 거래하지 않는 소신도 있다. 기술에 대한 존중이 먼저요, 내 물건에 대한 자부심이 없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다는 그의 우직함이다.

"수십 년간 거래해 온 고객이 가게를 늘리거나 잘된다는 얘기를 들을 때 기쁘지요. 와서 그래요. '속 안 썩이고 잘 만들어줘서 고맙다'고요. 그 순간이 최고 보람입니다." 

그는 지난해 서울시가 선정한 '금손장인'에 선정돼 을지금손박물관에 생애와 업적이 전시되는 경사를 맞기도 했다. "서울시에서 사람들이 왔길래, 저보다 선배들도 많다, 어디어디로 가보시라고 했거든요. 그런데 결국 선정돼서 의아하기도, 한편으론 기쁘기도 했습니다. 그동안의 세월을 돌아보며 앞으로의 삶을 생각해보는 계기도 됐고요."

지금도 매일 아침 한시간 넘게 축구를 하고나서야 출근하며, 가정에서도 건물 관리 및 청소를 도맡고 있다. 체력을 기르는 자기관리다.  

"제가 꼭 엊그제 법호 '은산(恩山)'을 받았습니다. 삼타원 최도화 선진 집안인 아내와 결혼해 잠실교당에서 입교하고, 경계 때마다 교법의 은혜로 헤쳐나갔어요. 무엇보다도 일원가족을 이루며 살 수 있으니 늘 감사할 뿐이죠." 

어린이회부터 지금까지도 신앙을 함께 하고 있는 쌍둥이 딸 유인·유소와 그에게 천군만마와도 같은 사위 안도석 교무, 거기에 일가 친척들 모두 압구정·도봉·신림교당에서 알뜰한 주인으로 살고 있어 든든하다는 그다. 

직장 수명은 짧고 인생은 긴 시대, 기술의 가치가 더욱 커지는 이때 40년 가까이 대한민국 의류 제조업에 헌신해 온 그의 손이 거룩하다. 일찍 내다보고 과감히 기술을 선택한 그의 혜안과 성실함과 책임감으로 지켜온 세월. 그의 손때 하나하나가 켜켜이 쌓여있는 '영랍빠'는 그 어느 가게보다도 환하고 듬직했다. 

[2018년 9월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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