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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문답] 솔성, 분별주착 떠난 불이문의 실행공부
[교리문답] 솔성, 분별주착 떠난 불이문의 실행공부
  • 유원경 기자
  • 승인 2018.10.09
  • 호수 19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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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문답/ 교화훈련부 권도갑 교무
권장사항의 솔성요론을 잘 실행하면 계문도 저절로 해결
언젠가 부처가 되겠다는 생각은 허상, 지금을 소중히
자기를 살피는 것이 정의, 상대에 대한 분별시비가 불의
[원불교신문=유원경 기자] 계문으로써 금지항목의 취사의 공부가 있는 반면, 권장사항의 솔성요론이 있다. 그러나 이 솔성요론을 보게 되면, 계문처럼 해당조목에 유념과 무념을 챙겨 실행여부를 살피는 조건이 명확하지 않고, 공부 방향에 대해 이해가 어렵기도 하다. 이번 교리문답에는 솔성요론이 이끌고자 하는 방향은 무엇이며, 어떻게 표준잡고 공부 길을 열어가야 할지 교화훈련부  권도갑 교무에게 문답했다.

-금지조목으로 계문이 있고, 권장조목으로 솔성요론이 있다고 했다. 권장조목으로 솔성요론을 밝혀준 이유와 의미는 무엇인가
솔성요론은 성품을 실현하는 요긴한 법으로 일원상의 진리와 무시선법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길이다. 또한 솔성요론을 잘 수행하면 계문을 해결하는 힘이 생긴다. 일반적으로 종교에서 계율은 '하지 말라'는 명령이나, 소태산 대종사는 계문에서 '하지 말며'라 가르쳤다. '살생을 말며', '도둑질을 말며' 등의 표현은 지금의 자신을 정확히 살피라는 뜻이다. '계율'은 지키는 것인 반면, 대종사가 말한 '계문'은 있는 그대로 자신을 살펴서 깨어나게 하는 것이다. 

계문의 결론을 보면 결국 탐·진·치인데 우리는 대부분 이것을 나쁜 것이라고 판단한다. 그러나 탐·진·치를 달리 보면 깨달음을 얻게 하는 귀한 경험이 될 수 있다. 탐·진·치를 없애려 하면 삼독이 되나 받아들여서 살피면 삼보(三寶)가 된다. 대소변을 참으면 독이 되나 잘 배설하면 건강에 좋은 것과 같은 이치이다. 

대종사는 탐심 즉 "욕심은 없앨 것이 아니라 더 키우라"고 했고, 진심이 포함된 희·노·애·락의 감정을 "잘 부려 쓰라"고 지도했다. 또한 치심을 해결하는 공부는 내가 모른다고 하여 어리석음을 인정할 때 지혜가 밝아지는 것이다. 말하자면 탐·진·치를 분별하여 나쁜 것으로 보지 않고, 살펴서 공부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준 것이다. 마음은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게 된다. 권장 조목인 솔성요론의 가치는 여기서 더 중요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솔성요론은 이와 같이 마음에서 일어나는 분별이전의 성품을 밝혀서 선과 악을 나누어 보는 분별을 내려놓고 자유를 얻는 공부법이다. 

-공적영지의 광명을 따라 선악업보의 차별이 생겨나는 것이 성품의 속성 아닌가? '정당한일이어든 죽기로써 하고 부당한 일이어든 죽기로써 안하는 것'이 어떻게 성품을 거느리는 도라 할 수 있나. 성품을 여의지 않는 정의란 무엇인가? 
세상 사람들이 법과 질서를 잘 지키고 복을 짓고 선을 행하는 것이 정당한 일이고, 법을 어기며 죄 짓고 악을 범하는 것이 부당한 일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사실일까? 우리는 스스로 물어서 답을 얻기보다 누군가에게 듣고 배운 것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전쟁이 났을 때 많은 적을 물리치고 승리를 이끈 장수는 영웅 대접을 받지만, 상대적으로 적의 입장에서 보면 잔인한 살인자가 된다.  

진리를 신앙하는 사람에게 죽기로써 해야 할 정의와 불의는 이런 상대적인 관념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무시선법에서 선이라 하는 것은 분별주착이 없는 성품을 오득해 마음의 자유를 얻게 하는 공부라고 했다. 선은 취하고 악을 버리며 정의는 취하고 불의는 버리겠다는 것도 마음의 주착된 분별이다. 이렇게 하면 길을 벗어난다. 성품에서는 분별과 주착이 없는 자리를 찾아 취사하는 것이 정의며, 그것이 솔성하는 공부임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무시선법에서 '시비선악과 염정제법이 다 제호의 일미를 이루리니 이것이 이른바 불이문(不二門)이라 생사자유와 윤회해탈과 정토극락이 다 이 문으로부터 나온다'고 했다. 또한 성리품 4장에서도 '큰 도는 원융하여 유와 무, 이와 사, 생과 사 등의 분별이 둘이 아닌 하나다'는 불이문을 말했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보면 분별하지 않고 하나가 되는 것이 정의고, 둘로 나누어 분별하는 것이 불의가 된다. 죄와 악, 고와 그름을 나쁘다고 고치려는 순간 복과 선, 낙과 옳음도 무너진다. 이것이 분별 주착이 주는 결과인 것이다. 음을 나쁘다고 버리는 순간 양도 함께 사라지게 되어 음양 상승하는 진리의 모습을 잃어버린다. 

-그렇다면 시비이해의 표준을 어떻게 가려야 하나 
앞서 제시한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일상수행의 요법도 제대로 실천하기 어렵다. 요란함, 어리석음, 그름을 버리고 고요와 지혜, 옳음을 얻을 수 없다. 오히려 이들을 받아들여서 경험하면 그 속에 숨겨진 고요, 지혜, 옳음이 드러나게 된다. 이것이 불이문의 소식이다. 일체 분별을 나누지 않고 하나로 보는 것이 정의다. 나와 너, 죄와 복, 선과 악, 그름과 옳음을 나누어서 하나는 버리고 하나는 취하여 이들의 원융함을 외면하는 불의를 범하고 있지 않은가.

성리품 5장에서 "큰 도는 서로 통하여 간격이 없건마는 사람이 그것을 알지 못하므로 스스로 간격을 짓게 되나니 누구나 만법을 통하여 한 마음 밝히는 이치를 알아 행하면 가히 대원정각을 얻으리라"고 했고, 인도품 36장에서는 "그 사람을 흉보거나 비웃지 말라. 어리석은 사람은 남의 허물만 밝히므로 제 앞이 늘 어둡고, 지혜 있는 사람은 자기의 허물을 살피므로 남의 시비를 볼 여가가 없나니라"고 설명했다. 

삶 속에서 상대를 거울로 보아서 나를 살피는 것이 정의고, 상대를 시비하는 것은 죽기로써 하지 말아야 할 불의다. 너와 나를 나누어서 남의 허물만 밝히는 것은 불의이고, 그들의 허물을 거울삼아 나의 허물을 밝히는 것은 정의이며 깨달음이다. 다른 사람의 적폐를 청산하기 전에 나의 적폐를 청산해야 한다. 너와 나를 분별하지 않고 원융한 하나로 본다면 내가 만나는 사람의 죄와 잘못은 정확히 나의 죄와 잘못인 것이다. 

-솔성요론은 말 그대로 성품 거느리는 방법이니, 견성 즉 깨침이 없으면 솔성의 도를 따를 수 없지 않겠는가? 견성 못한 이는 솔성요론 공부를 어떻게 할 수 있는가? 
견성을 했다 못했다 하는 것도 분별이다. 이런 분별을 내려놓고 본다면 우리 삶이 온통 성리의 바닷 속에서 살고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분별과 차별, 비교와 간격이 없이 나와 세상을 존중하며 받아들인다면 성품을 볼 수 있으나 현실을 거부하고 저항하면 결코 하나의 진리를  보지 못한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목표를 강조하는 삶을 살고 있다. '공부 잘해라. 성공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지금의 나를 끊임없이 부정하는 것이다. 지금의 나는 내가 그토록 바라던 목표이다. 탄생 자체가 놀라운 성공이며 지금 여기 살아있다는 것이 기적이다. 분별하고 비교하면 지금의 나는 늘 부족하고 모자라서 더 나은 나, 성공한 나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이처럼 나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지 못한다면 이것이 가장 큰 불신이고 불의이다. 육조 스님은 '번뇌가 보리이며, 중생이 곧 부처'라고 했다. 그렇다면 무시선법에서 밝힌 불이문은 이와 같은 것이다. 지금 이 시간이 가장 귀한 시간이며, 지금 하고 있는 일이 가장 좋은 일이고, 지금 만나는 나와 인연들이 모두 부처이다. 지금 여기가 이미 광대무량한 낙원인 것이다. 이를 자각하는 것이 견성이다. 진리는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여기에서 영원히 차고 넘치게 존재하고 있다. 그렇다면 언젠가 부처가 되겠다는 생각은 허상인 것이다. 

-'다른 사람의 원 없는 데에는 무슨 일이든지 권하지 말고 자기할 일만 할 것이요'라 했다. 가르치는 이와 지도받는 이의 관계나 도가의 공중사는 '원이 없으되 권해야'하는 경우가 있지 않는가. 이 조목의 본의가 무엇인가    
원 없는 데에는 무슨 일이든지 권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은 사람을 지도하는 중요한 지침이다. 훌륭한 지도자는 사람의 원을 찾아서 이를 실현하게 하며, 일보다 사람을 귀하게 여긴다. 지도받는 사람이 원하지 않는 일을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할 때 이를 존중한다.

꼭 해야 할 일이라면 마음이 살아나서 하고 싶은 마음이 나도록 동기부여를 해줘야 한다. 신심 공심을 강조하며 하고 싶지도 않을 일을 권위로 강요할 때 그 조직은 살아나기 어렵다. 우리시대에는 그 사람의 원을 키워주고,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따뜻한 배려가 필요할 뿐, 아무리 공중사라 해도 실행과 행동을 억지로 시키는 것은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2018년 10월1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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