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민하고 화내는 아버지와 그 모습 닮아가는 나
아버지가 건넨 〈원불교교전〉과 가족의 긍정적인 변화

[원불교신문=김동주 피디]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했다. 아버지는 일년에 한두 번씩 입원하는데, 그럴 때마다 팔다리가 더 얇아지고, 주름이 짙어지고, 검버섯이 생긴다. 그리고 그런 아버지를 보는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아버지와 나 사이에 남은 시간은 해가 다르게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 

아버지는 종교를 갖지 않으려고 했었다. 젊은 시절부터 종교를 가진 사람들의 모습에서 계속 실망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청소년기 내 눈에 비친 아버지는 매우 예민하고, 쉽게 화를 내고, 화가 나면 점점 더 폭발하는 성격이었다. 더구나 끝내는 사업의 실패를 거듭하며 절망에 빠져들었다. 

나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에 부담을 느꼈었던 것 같다. 대학에 들어가서부터는 아버지와 대화가 아예 끊어졌고, 아버지의 말씀을 잔소리로만 듣게 됐다. 그리고 내가 군대에서 상병이 됐을 때, 아버지에게 깊은 병이 생겼다. 신장이 망가져 이제 계속 투석을 받게 된 것이다. 그 후로 아버지는 더욱 심한 절망과 고통에 빠져들었다. 

군대에서 그 소식을 접한 나는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대신 안타까운 마음과 한없이 속상한 마음이 들었다. 다시 아버지를 만나면 대화도, 위로도, 응원도 많이 해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휴가를 나가 만난 아버지와의 대화는 역시나 힘들었다. 아버지의 일방적인 말씀과 자식으로서 그 말씀을 무조건 듣기만 해야 하는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겼다. 때때로 나는 매우 예민해지고, 자주 화를 냈으며, 화를 내면 주변사람이 놀랄 정도로 감정이 폭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화가 지나가면 스스로를 조절할 수 없다는 생각에 절망과 슬픔이 밀려왔다. 가만보니, 영락없는 아버지 모습 그대로였다. 

아버지의 모습을 내가 닮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감정이 폭발하는 상황 자체를 피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화가 날 때는 무조건 참는다'는 다짐 뿐이었다. 그러나 감정이 생기면 그 감정에서 쉽게 헤어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과 쉽게 다투는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갈등을 이겨내지 못하고 직장을 떠나게 되는 일까지 생기고 말았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런 나를 걱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달래며 '경계'라는 것을 말씀해 주셨다. 그리고 내 손에 <원불교교전>을 쥐어 줬다. 나는 놀랐다. 평생 종교에 대한 불신만을 강조하던 분이 원불교의 가르침을 말씀하는 것이 낯설었던 것이다. 그런데 동시에 그 순간, 내가 겪고 있는 마음의 문제가 아버지가 겪어 왔던 마음의 문제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 수 있었다. 그렇게 아버지에 이어 나도 원불교 교도가 되었다. 

그때부터 변화가 일어났다. 그 후로는 아버지와 나는 만나기만 하면 막힘도 없고 끝도 없이 대화를 이어간다. 서로의 생각을 경청하고 의견을 주장하며 받아들이는 토론이 이어지는 바람에, 어머니가 우리 부자의 잠자는 시간을 걱정할 정도다.

아버지와 나는 하늘아래 가장 가까운 혈연이면서도, 동시에 서로에게 가장 쉽게 깨달음을 줄 수 있는 도반이 됐다. 우리들의 변화는 주변 가족들의 변화로 이어졌다. 큰고모, 둘째고모, 넷째고모, 작은아버지도 교도가 되어 법연으로 맺어졌고, 명절이 되면 우리가족은 원불교 이야기로 대화의 꽃을 피운다. 그리고 올해 추석에는 음식을 차리고 차례를 지내는 대신에 원불교 교당에서 추도식을 올리자고 모두가 뜻을 모았고, 처음으로 그 결의를 실천했다. 

그날 불단에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위패가 모셔졌다. 우리가족의 첫 번째 원불교 교도는 할머니였다. 할머니의 신심과 공심, 공부심과 서원, 기도가 우리가족의 변화를 만든 씨앗이었다.

그런데 죄송하게도 할머님에게 한번도 '감사드린다'는 말씀을 드리지 못했다. 살아계실 때 할머니가 전해준 대종사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언젠가 다시 할머니와 만나는 인연의 시절이 오면 그때는 내가 먼저 이 법을 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원음방송

[2018년 10월2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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