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이혜성 교무] 차를 얻어 타고 이동 중, 갑자기 운전자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통화를 마치더니, "잠깐만 기다리세요. 다녀올 곳이 있어요 빨리 올게요." 미심쩍다. "딱 봐도 잠깐은 아닐 것 같은데." 잠깐만 기다리라며, 차가 씽씽 다니는 도로 한 모퉁이에 차를 세운다. '차라리 어디, 기다릴 수 있을 곳에 내려주지' 하는 생각도 든다. "금방 올 수 있겠어요? 내가 다른 데 가서 기다릴까요?" 했더니 아니란다. 곧 온단다. 오래 걸리는 일이 절대 아니란다. 조금만 기다리면 된다고 걱정하지 말란다. 

기다리기 적절한 장소가 아니었으나, 일단 알겠다고 말하고 차를 보낸다. 그리고 기다림은 시작됐다. 

마음이 자꾸 시간으로 간다. 몇 분 지났지? 6분 지났다. 많이 지난 줄 알았는데 겨우 6분이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오겠지." 도로는 적막하고, 차들은 빠르게 달린다. 다시 시간을 확인한다. 13분 지났다. 조금 있다가 또 시간을 확인한다. 16분 지났다. 역시 금방 못 올 것 같았다. "근처에 어디 들어가 있을 곳이 없나?" 살펴보는데 근처엔 정말 아무것도 없다. 

갈 곳이 없다는 느낌, 왠지 처량하고 서늘하다. 20분까지만 기다리고 전화를 해보자. 차가 오는 쪽으로 머리를 돌려, 차만 내내 바라본다. "저 차인가? 아니네." "저 차 맞는 것 같은데? 아! 또 아니네." 몇 번이나 반복 했을까. 계속 아니다. 내가 기다리는 그 차는 아니다. 양심적으로 20분 안에는 와야 하는 거 아닌가? 자꾸자꾸 시간만 본다. 18분, 19분, 20분, 아직도 안 왔다. 전화를 해야겠다. 그런데 20분 만에 전화하는 건, 좀 야박하다는 생각도 든다. "내가 전화하면 마음이 급해질 텐데." 30분까지만 더 기다리고 전화를 하자 결심한다. 마음은 그리 먹었지만, 불편함이 가시지를 않는다. 

진짜 내가 이럴 줄 알았다. 그냥 고집부리지 말고, 애초에 편히 기다릴 수 있는 곳에 세워주지. 빨리 나올 수 있다고 장담하더니! 장담이나 하지 말던가. 사실, 애초에 내 부탁으로 동승한 것도 아니었다. 내 차로 오려는데, 굳이 같이 가자더니 나에게 왜 이런 시련을 주나. 아니, 그리고 20분이나 지났으면 전화라도 한 통 해주지. 자기 때문에 기다리는 사람은 안중에도 없나. 참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든 찰라, "근데, 나도 좀 이상하다." 

좌선은 한 시간도 하고 산책은  30분도 족히 하면서 기다리는 일은, 10분 20분이 불편하다. 좌선 할 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무엇이 다른가. 나를 내려주고 간 '대상'이 생기니, 시간을 온전하게 보내지 못한다. 빈 배와 부딪히면 놀랄 뿐 별 생각이 없지만, 사람이 탄 배와 부딪히면 화가 나는 것과 같다. 

대산종사는 "성현의 마음은 상대가 끊어진 절대의 일원에 늘 합해 있고, 중생의 마음은 상대 있는 사량 계교로 늘 다투고 있다"고 법문했다.(<대산종사법어> 운심편41장) 

상대방이 없으면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있는 것'이 된다. 그냥 있는데, 초조하고 요란하고 심지어 화가 날 필요가 뭐가 있단 말인가. 좌선은 한 시간도 부족하다고 말하면서, 이 시간에 '서서하는 선'은 왜 못한단 말인가. 내 마음에 살짝 '상대방'을 지우니, 내 마음의 평화가 거기에 있다. 비로소 도로가에 햇살이 느껴진다.

/중앙중도훈련원

[2018년 10월2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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