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이혜성 교무] 으아아앗~ 깜짝이야! 운전 중 어떤 차가 내 앞에 '칼처럼' 밀고 들어온다. 너무 놀라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아찔한 순간이다. 근데, 이 차량 볼수록 가관이다. 빠르게 옆 차선으로 이동한다. 때문에 옆 차도 브레이크를 밟았다. 보아하니 이 차는 그 유명한, '칼치기 차량'이다. 좌로 우로 차선을 마구 변경하는, 절로 욕을 부르는 운전자다. 이 시점에서 짚고 가자. 나는 욕을 부르는 상황에서도 욕을 하지 않는다. 운전은 생명에 직결된 것이라 너무 놀라면, 순한 '이씨~' 같은 말이 나온다던데 난 그것도 못한다. 

운전과 본래성격이 관련 있다면, 나는 본디 소심하다. 7년차임에도 운전이 여전히 무서운 걸 보면 소심이 맞고, 더욱이 옆 차가 빵빵거리기라도 하면 소심이 빛을 발한다. 물론, 내가 입도 뻥긋 안하는 것은 아니다. 욕 대신 '꼭 하는 말'이 있다. '아저씨~ 몇 분 빨리 가려다 몇 십 년 빨리 갑니다!" 고속도로에서 읽은 글인데, 기억에 오래 남았나보다. 언제부턴가 욕을 부르는 사람들에게 혼잣말로 중얼거리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그 말을 내뱉다 문득, 마음이 멈춘다. 난 욕은 안한다면서, 실은 저주를 하고 있구나. "몇 분 빨리 가려다 몇 십 년 빨리 갑니다"에 담긴 뜻을 그대로 표기하면 "너 그러다 일찍 죽는다"였다. 이는 걱정 같지만 저주에 가깝다. '너 빨리 죽을 것 같아'라는 말이다. 욕은 안한다면서 상대의 불행을 빌고 있는 나를 보며 하나의 편견을 발견한다.

나는 그냥 '욕설'이 싫은 거다. 욕하는 사람이 싫으니, 욕을 하지 않을 뿐이다. 상스러운 욕설은 물론, 감정이 격해져 내뱉는 모든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감정이 격해지면, 그 순간엔 말을 하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이것이 '나의 감정과 행동'을 컨트롤하는 데만 이용돼야 하는데, '상대의 행동'을 평가하는 지표로도 사용된다는 것이다. 상대가 격한 말을 하거나 욕설을 하면 '그 찰라' 상대를 폄하해왔다. 

단지, '욕'이라는 표현에 대한 편견이다. 그러니 욕은 못한다고 하면서, 저주는 하는 나의 모순이다. 면밀히 살펴보자. '너 그러다 일찍 죽는다'는 말엔 실은 비난이 있었다. 내 마음에선 '너 그러다 일찍 죽어라'라고 말한 거다. 그렇다면 이것이 욕설과 뭐가 다른가. 표현만 다를 뿐이다. 

대산종사는 "지금은 천지가 한 번 크게 바뀌는 시대라, 법 있는 사람이 귀신도 모르게 미워하더라도 상대에게 해가 미칠 수 있나니 법을 갖추면 갖출수록 마음가짐을 더욱 조심해야 하느니라"고 법문했다. (〈대산종사법어〉 운심편 27장) 

표현보다 중요한 것이 '마음가짐'이다. 내가 실은 어떤 마음가짐이었는지는, 내가 안다. 상대를 걱정하는 척 하며, 상대의 과실을 말해왔다. 상대의 앞날을 위하는 척하며, 상대의 앞날이 어두워질 것이라 단정하곤 했다. 실은 그 모든 때, '걱정을 빙자한 저주'를 해왔는지도 모른다. 정말 걱정한다면, 실은 축복을 해줘야 맞는 것이 아닐까. "아저씨~ 그러다 일찍 죽습니다"라고 하지 말고 "아저씨 오래 사세요"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숨어있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걱정을 빙자한 저주' 말고 '걱정하며 축복'해주자. 

/중앙중도훈련원

[2018년 12월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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