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이혜성 교무] 좌선 후 나오는 길이다. 실내화를 바닥에 놓다 잠시 딴생각을 했나, 실내화가 모과처럼 떨어졌다. 앗! 옆의 도반이 이리 생각할 것 같다. "선을 열심히 하면 뭐하니. 신발 하나 놓을 때도 방심인데." 타인의 기척을 신경 쓰다, 마음을 멈추고 나를 바라본다. "또 소설을 쓰고 있구나. 그건 너의 기준이다." 실은 내가 그랬다. 내가 그리 평가했던 기억이 있다.

원불교학과 시절, 내 유·무념조항 중 하나가 '신발 집고, 놓고, 신을 때 마음 멈추기'였다. 집을 때 멈추고, 놓을 때 멈추고, 신을 때 멈춰서 온전함을 챙기려는 것이었다. 수시로 발생하는 일이었기에 수시로 멈추는데 유용한 도구가 됐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한다. 내가 신발 놓고 잡는 것으로 공부를 하다 보니, 어찌된 일인지 남들이 신발 다루는 것만 눈에 보인다. 그리고 생각한다.

'아, 저 사람은 공부인이구나. 신발 놓는 것을 보니.' '저 사람은 흉내만 내고 공부인은 아니네. 신발 하나 놓을 때도 마음을 못 챙기는구나.' 주위에 온통 '신발 잡고 놓는 사람들'만 보인다. 신발로 공부인과 비공부인을 나눌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물건을 꺼내려고 서랍을 여닫는데 한 도반이 말한다. "아~ 좀 살살 닫아요. 마음을 챙겨서 닫아야지 왜 마음을 안 챙기나." 앗! 이 생각은! 내가 아까 '신발을 던지듯 내려놓던 도반'에게 했던 '그 생각'이다! 순간 깜짝 놀랐다. 내게 '나는 공부인'이었다. 그리고 '그는 공부인이 아니었다.' 그런데 실은 그게 아니다. 내 공부 수단이 신발이었을 뿐, 아마 상대에겐 다른 수단이 있었을 거다. 신발은 마음을 멈추게 하는 수단이었는데, 난 수단으로 공부인인가 아닌가를 규정하고 있었다. 수단은 수단으로써 의미가 있는데 절대평가의 기준처럼 사용하는 오류를 범한 거다. 

물론 그날 이후에도 그랬다. 내가 열심히 무언가를 할 때, 그것을 안 하는 사람이 주로 눈에 보였다. 상시일기를 잘 쓸 때는, 상시일기 안 쓰는 사람은 공부가 옅다고 생각했다. 내가 상시일기는 소홀해지고 기도생활을 열심히 할 때는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생명력이 없다고도 생각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마음을 멈추고 또 나를 바라본다. 실은 '모두가 공부인'이었다. 신발로 공부하는 공부인, 서랍으로 공부하는 공부인, 기도로 공부하는 공부인이 있었을 뿐이다. 대산종사는 "옅은 시냇물은 희게 보이고, 좀 더 깊은 강물은 푸르게 보이고, 더 깊은 바다는 검게 보인다" 하며 "자기가 흰빛이라 하여 검은빛으로 보이는 수양인을 비교하고 함부로 평가하지 말라. 잘못하면 죄를 짓게 된다. 천여래 만보살이 배출되는 큰 회상에는 드러난 성인도 있고, 숨어서 일하는 성자도 있다. 너희들이 공부할 때 남과 비교하지 말고 내가 나를 항상 비춰보는 생활로 정진하여야 불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법문했다. (<대산종사법문집> 3집 제3편 수행 101) 

다만 나를 비춰보자. 남이 공부인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면, 나의 집착을 발견하면 된다. 그럴 때 '나의 판단'이란 '내가 어디에 집착되어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거울'일 뿐이다. 내가 기울어져 상대를 기울게 보는 거다. '모두가 공부인'이자 '모두가 부처'임을 잊지 말자. 

/중앙중도훈련원

[2018년 12월28일자]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