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익선 교무

[원불교신문=원익선 교무] 참회는 불교용어다. 그 연원은 석가모니불의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매월 초하루나 보름이면 승가의 대중이 모여 포살(布薩, Posadha)을 진행했다. 전 대중 앞에서 장로가 먼저 포살의 의미를 설명하고, 오계, 십계, 250계의 조목 하나하나에 대해 청정한가를 묻는다. 세 번을 묻는 동안 그 계율을 어긴 사람은 자신의 허물을 참회하는 의미에서 부처님 전에 삼배를 올렸다. 마지막엔 대중에게 다시 묻고 함께 참회의식을 가졌다. 이는 허물을 고백한 사람에 대한 배려였다.

또 하나 자자(自恣, Pravarana)를 행했는데, 하안거가 끝나는 날인 7월15일에 전 대중이 모여 자기반성과 함께 안거 기간 저지른 죄를 대중 앞에 고백하는 것이다. 부처님도 당시에는 대중에게 자신의 허물이 있는지 없는지를 물었다고 한다. 이러한 포살과 자자는 내용은 다름이 없지만 다소 변화된 형태로 모든 불교권에서 행하고 있다. 이 포살과 자자가 없다면 불교는 모양만 유지하게 되는 것이다. 법을 담을 수 있는 자신의 마음을 비우지 못해 어떠한 가르침도 들어올 수 없기 때문이다. 

대승불교 특히 중국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불교의 전통을 이어 참법(懺法)이 발전했다. 참법의 의미 또한 초기불교의 정신과 다르지 않다. 수행정진을 더욱 북돋우기 위해 참회 의례를 실천하게 되었다. 유명한 참법으로는 양무제의 〈금강반야참법〉, 양나라 승려들이 편찬한 〈자비도량참법〉, 천태지의의 〈법화삼매참의〉 등이 있다. 천태지의 또한 수행과 참법을 둘로 보지 않았다.

〈정전〉의 참회문에 등장하는 이참과 사참은 천태지의의 설법 내용인 〈마하지관〉에 나온다. 

천태지의는 실상의 이치를 관법으로 깨치는 것을 이참, 참회를 행동으로 나타내는 것을 사참이라고 한다. 이 둘은 서로 연동되어 있다. 일체의 죄성은 공성(空性)이므로 죄가 원래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망령된 마음에서 일어난 것이다. 이 본래의 마음을 관하여 죄업의 본래자리로 돌아가 참회하는 것이 이참이다. 따라서 아무리 사참을 하더라도 이 이참의 단계에 이르지 못하면 참된 참회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이참이 아무리 수승하다 하더라도 수행을 통해 통달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따라서 진리의 대행자인 삼보 전에 뉘우치며 통렬한 반성을 하는 사참을 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만약에 나의 허물로 괴로워하는 이가 있을 때에는 그를 직접 찾아가 사죄를 구해야 한다. 영화 <밀양>에서는 죄를 저지른 자가 그 피해로 고통받고 있는 주인공에게 직접 사죄하지 않는다. 법과 종교가 죄인을 단죄하거나 죄를 사하여 줌으로써 참된 회복적 정의가 이뤄지지 않음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회복적 정의는 죄가 이뤄지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 모든 것을 원상회복시키는 것이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는 이뤄지기 어렵다.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극악무도한 경우가 그 대표적인 예다. 그럼에도 회복적 정의가 필요한 이유는, 이 모든 뿌리 없는 죄악은 숱한 업연으로 맺혀진 번뇌에 의해 일어났음을 인식하기 위해서다. 따라서 어떤 죄업이라도 이러한 죄의 원리를 깨닫는다면, 서로가 서로를 용서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될 수 있다. 인간의 한계를 서로 이해하고 공유함으로써 사회에 횡행하는 죄업의 원인과 그 환경을 제거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원광대학교

[2019년 1월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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