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원익선 교무] 죄업의 근본인 탐진치는 인간 개개인은 물론 인류문명이 지니고 있는 가장 큰 해독이다. 참회를 할 때도 이 삼독심을 제거하지 않는 한, 업의 굴레는 그대로 굴러가게 된다. 결국 참회의 궁극은 이 삼독심을 제거하여 참된 열반과 해탈의 경지로 나아가는 데에 있다. 인간의 한계는 곧 현대문명의 한계다. 인간 스스로 마음병을 성찰하지 않음으로써 수많은 사회적 질병과 고통을 낳고 있는 것이다. 개인과 인류 전체는 마음의 질병을 치료하여 새롭게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계문에서도 법마상전급의 마지막 단계인 이 삼독심을 제거해야 법강항마위에 오를 수 있다. 이것은 초기불교로부터 오늘에 이르는 모든 불교의 가르침과도 같다. 깨달음을 통해 참된 영혼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이 관문을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 생사해탈과 영혼천도에서 이 삼독심의 제거가 중심과제가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참된 심낙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마음의 어둠을 제거하고, 삼라만상을 다 비추는 호수와도 같은 마음, 텅 빈 창공의 푸른 하늘과도 같은 마음을 회복해야 한다. 마침내 모든 중생들을 다 품어 안고, 밝은 지혜로 인도하는 부처가 되는 것이 우리 삶의 최종목적이다. 

이를 위해서는 평소에도 수행심의 증진을 통해 마음을 전환시켜 가는 것이 중요하다. 대소승불교권에서 행하고 있는 수행방식을 간략하게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욕심은 부정관(不淨觀)으로 대체한다. 욕심은 인간이 영원히 존재할 것이라는 착각에 의해 일어나며, 육신이나 물질에 집착함으로써 일어난다. 특히 육체에 대해서는 부정한 모습을 관함으로써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다. 사실 존재 자체가 고정되어 있는 것은 없으며, 지금의 형체는 반드시 무너져 티끌로 돌아간다. 제행무상은 이것을 의미한다. 모든 욕심을 내려놓는 것이야말로 수행의 기본원칙이다.  

다음으로 성냄은 자비관으로 대체할 수 있다. 자비관은 자애로운 마음을 내는 것을 말한다. 화를 내는 것은 타인과 나의 뿌리가 하나임을 모르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는 하나의 세계 속에 살고 있으며, 같은 법신불의 자손이다. 모든 이웃은 그 나름의 절대적인 세계를 지니고 있으며, 내가 공경하고 환대해야할 대상이다. 자기중심적인 사고가 바로 성냄의 근원이며, 그것을 통해 계급화, 차별화한다.

타인에 대한 자비는 곧 자신에 대한 자비다. 타인은 나의 다른 모습임을 깨닫고 통찰할 때, 우리는 일체임을 확인하게 된다. 석가모니부처님 당대부터 모든 사람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자비희사(慈悲喜捨)의 4무량심(四無量心)을 오늘날에도 중요한 가르침으로 받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지막으로 어리석음은 반야의 지혜로 바꿀 수 있다. 어리석은 마음은 무명에서 나온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함에 따라 이치를 바르게 판단하지 못하는 마음이 곧 어리석은 마음이다. 어둠과 밝음은 한 마음에서 발한다. 따라서 어둠과 탁함은 밝음과 맑음으로 대체하면 된다. 어두운 공간을 밝히기 위해서는 밝은 빛이 들어오도록 하면 되고, 탁한 호수를 맑히기 위해서는 한 곳에서 쉬지 않고 흘러나오는 샘이 있으면 된다. 이로써 실상은 드러나고, 무명은 자취를 감추며, 마음은 지혜의 광명으로 가득 차게 된다.

/원광대학교

[2019년 1월1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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