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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의법향] "교단에 대한 기도, 별거 아닌 것 같지만 꼭 해야합니다"
[선진의법향] "교단에 대한 기도, 별거 아닌 것 같지만 꼭 해야합니다"
  • 정성헌 기자
  • 승인 2019.03.12
  • 호수 19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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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산 박관덕 원로교무
[원불교신문=정성헌 기자] 조선 건국과 함께 하루아침에 탄압의 대상이 되어버린 불교는 살아남을 길을 모색해야 했다. 일부는 산속에 은둔하며 참선 등 수행정진으로 불법의 맥을 잇기위해 노력했고, 일부는 폐사(廢寺)를 막기 위해 기름이나 종이, 신발을 만드는 제반 잡역에 종사하면서 사원을 유지했는데 이때 나온 말이 이판·사판이다. 그러나 장좌불와로 토굴수행하는 이판들도 결국 잡역에 종사하며 벌어다 놓은 사판들의 공양이 아니었다면 면면하기 어려웠을 터인지라 어찌 불법의 맥이 온전히 이판의 공덕이라 할 수 있겠는가.
수계농원을 시작으로 평생 농업에 종사하며 간난한 시절 중앙총부와 개 교당 굶주림을 책임졌던 관산 박관덕(76·寬山 朴冠德) 원로교무. 교단에 헌신해온 그의 삶은 전무출신이었다.

술 끊으려 찾아간 교당
전남 완도군 군외면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독서를 좋아했다. 그러나 가난했던 그의 집안은 한숟가락이라도 줄일 요량으로 14살 되던 해 완도 죽창리에 있는 외삼촌 집에 맡겨졌다. 학구열이 불타던 사춘기 시절을 논일, 밭일하며 고생하며 자랐던 그는 3년이 지나자 다시 작은 외삼촌 집으로 옮겨야 했다. 그러나 마을 건달이었던 작은 외삼촌이 치욕을 주는 등 못살게 굴자 그는 집으로 돌아와 버렸다.

"그때 어찌나 서럽던지 3년만에 집으로 돌아와서 술을 먹었어. 길을 잘못든 것이지. 안먹으면 못살겠더라고."

그는 집안 어른들을 모시고 살다가 군대를 다녀왔다. 그러나 살다보니 또 술을 먹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는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마음에 불목교당을 찾았다. 당시 불목교당은 완도 지역유지였던 김영현씨의 행랑채에서 출발했다.

"신제근 교무, 신도형 교무가 그 영현씨 행랑채에서 시작했지. 나중에는 불목초등학교 뒤에 있는 높은 동산으로 옮겼는데, 김영현씨 세력이 되니까 산 위를 깎아서 교당을 지었지. 창립요인이여."

27살의 청년이었던 그가 법회에 참여하면서 출가를 결심하게 됐을 때는 심혜관 교무가 주임교무였을 때다. 전무출신을 하려면 익산에 있는 중앙총부에 가야한다는 말에 그는 완도에서 익산까지 걸어갔다.

"처음 술을 안먹기 위해서 교당을 찾았는데 그래도 술이 안끊어지니까 교무님과 상의해서 출가했지."

당시 총부에서는 10월마다 교무 강습회가 열렸는데, 거기에 참석한 심혜관 교무를 만나 출가지원서를 총부에 내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는 어렵게 총부에 당도해 이종진 교무를 만났고 하룻밤 잔 뒤에 다음날 바로 수계농원으로 향했다.

수계농원과 부랑민
그 당시 수계농원에는 근산 지해원 교무, 승산 양제승 교무가 주재했다. 70년대 한국사회에는 사회 부랑민들이 많았다. 수계농원에는 떠돌아다니는 청년들이 들어와 일하면서 겨울이 지나면 다시 어디론가 떠났다.

"수계농원에 그 사람들이 장악하고 있었지. 수계리 동네 사람들은 농원 거지라고 그랬었어. 옷도 험악하게 입고 다니고. 다들 몇 달씩 살다가고 했는데 많을 때는 30명도 넘었지. 근산님은 호랑이 같고, 승산님은 참 부처님이여. 나는 승산님 따라다니면서 열심히 일했지."

수계농원에는 교단 최초로 경운기도 도입됐다. 70년 후반에 경운기가 보급화되자 그는 진주교당에 가서 경운기 교육을 받는다. "경운기 가지고 일 많이 했네. 경운기가 내 손에 들어와서 논이고 밭이고 그것으로 일을 다 했지."

수계농원은 양잠도 했다. 수계리 동네사람들을 동원해서 뽕잎을 주는 등 양잠 책임자가 바로 박용덕 교무였다. "간사로 같이 살았지. 스님이었어. 승복을 입고 서울시내를 돌아다니다가 거울에 비치는 자기 모습을 보고 나름 깨달은 것이 있어 여기로 출가한 것이여. 양잠 책임자 역할을 잘했어. 안나가고 버티고 사느라고 애 많이 썼지."

당시 고등학교 졸업한 사람들은 2년만 근무하면 공비생으로 추천돼 바로 교학과에 진학했다. 그러나 그러지 못한 사람들은 3년을 근무했고, 그는 지해원 교무의 강력한 추천으로 3년만에 공비생으로 발탁돼 영산선원 2년, 동산선원 3년 교육과정을 마쳤다.

2년 봉사근무 원칙
그는 학부를 졸업하고 다시 원기64년 다시 수계농원으로 발령받았다. 당시 수계농원에서는 졸업한 후 2년은 더 봉사근무해야 한다는 원칙이 있었기 때문이다. 뜨내기 인력이 전부였던 수계농원에서는 숙련된 인력이 그만큼 절실했기 때문에 생긴 원칙이었다. 이후 원기68년 영산사무소에서 근무하다가 원기74년 소남훈련원에서 근무한다.
"그때 철산농원에 있던 사람이 사고를 많이 쳤어. 그래서 수습할 사람으로 내가 대신 가게 됐지. 그리고 다시 총부로 왔는데 총부농원을 24년간 했네."

우리는 죽기살기로 했어
"우리가 일을 맡으면 죽기살기로 했어. 총부에 속한 논이 42필지나 돼. 직영은 열  필지 정도 지었지. 그러다보니 너무 무리했나 봐. 퇴행성 관절염이 생겨 두 다리 다 수술했지."

그는 일꾼 2명을 데리고 모든 농사를 지었다. 다양한 쌀을 생산해 총부에 현미, 백미, 흑미 등 밥을 지어먹게 하고, 교화부에 의뢰해 어려운 교당을 찾아 쌀을 보내기도 했는데 60~70개 교당이나 됐다.

"총부에서 농사지을 때 한필지에 쌀이 26가마가 나와. 열필지 농사니까 260가마를 생산했지. 총부에서 밥해먹고, 공판장에도 내고, 국가에 수매도 하고. 고생 많이 했네."

가을에는 잠자리를 포기했다. 나락을 걷어들여 건조기에 말려야 하는데 타이머 설정을 한다해도 어느 순간 기계가 꺼져버릴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또 저녁에 잠을 청하면 온갖 먼지 덕분에 코가 막혀 숨을 못쉴 정도여서 약국을 상시로 드나들었다.

좌선을 빠지지 않는 이유
그래도 그는 아침 좌선에 빠지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때는 잠을 제대로 못자. 그래도 좌선은 나갔지. 어느날 나는 무심히 좌선을 나가는데 전산종법사님(당시 교정원장)과 마주친거야. 나는 보통일로 생각했는데 종법사님은 나를 다르게 보셨나봐. '힘들게 농사지으면서도 좌선을 빠지지 않으신다'고 가는 곳마다 이야기를 하신다고 들었지."

그가 좌선을 빠지지 않는 이유가 있었다. "수계농원에서부터 좌선을 빠지지 않았어. 젊을 때였으니까 나름 정진하다가 한 자리 봤지. 그런데 그 경지가 이후로는 안나타나더라고. 그 자리를 맛볼라고 해도 안나타나. 그래서 그 자리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 좌선을 안빠지고 하는거 같아."

교단에 대한 기도
"근산께서 수계농원 원훈을 신심, 공심, 공부심으로 지어놓으셨어. 항상 우리에게 강조하셨던 게 이거였지." 그는 말을 이었다.

"우리는 몸바쳐서 일했어. 후진들은 그런 신심이 좀 약하지 않나 생각이 들어. 요즘 <조불불사 대산여래>나, <정산종사전>을 열심히 읽고 있어. 너무 좋더라고. 나는 매일 저녁에 기도를 하는데 교단에 대한 기도를 해. 그것이 별것 아닌거 같지만 꼭 그렇게 해야겠더라고. 그런데 우리 교무들은 그런 마음을 갖고 생활을 하는가."

원기97년 그가 퇴임하기까지 평생 몸을 아끼지 않고 수많은 공양미를 생산해 낼 수 있었던 원동력에는 교단을 향한 깊은 사랑이 있었다.

[2019년 3월1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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