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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떠올리는 '백지혈인의 이적'
다시 떠올리는 '백지혈인의 이적'
  • 김방룡 교수
  • 승인 2019.04.04
  • 호수 19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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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종교 틀 뛰어 넘는 혁명적인 발상 제시
김방룡 교도

[원불교신문=김방룡 교수] 최근 들어 매스컴을 통해 3.1 운동과 상해 임시정부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접하게 된다. 백주년이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남과 북의 화해 무드 속에서 민족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일어났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주변에서 '3.1 운동 당시 원불교와 소태산 대종사는 무엇을 했는가?'라고 묻는데, 적절한 대답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백지혈인의 이적'에 대해 말했어야 했는데, 순간 원불교인이 아닌 그 사람에게 논리적으로 설명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은 것이다. 

1916년 대각을 한 대종사는 새로운 회상을 창건하기 위해 방언공사와 저축조합 등을 통해 착실하게 기반을 다지고 있었는데, 1919년에 이르러 3.1 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그 뜨거운 불길이 영광지역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해 음력 3월26일부터 9인 선진들에게 10일 간격으로 늦은 밤에 각각 산상에 올라 기도를 하게 한 것이다.

그리고 7월16일에는 '인류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 놓을 수 있는가?'라는 대종사의 물음에 9인 선진들은 다음 기도 날인 7월26일 기도 장소에서 자결하기로 약속하였던 것이다. 7월26일 날 밤 소태산은 '죽어도 한이 없다(死無餘恨)'라는 증서를 쓰게 하고 각각 백지에 지장을 찍게 하였는데, 이 때 '백지혈인의 이적'이 나타난 것이다. 오늘날 원불교가 태동하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불상숭배까지도 비판하였던 대종사께서 자신을 믿게 하기 위하여 '백지혈인의 이적'을 강조했을 리는 없다. 만약 대종사 자신을 믿게 하기 위해 목숨을 내놓으라 했다면, 9인 제자들이 먼저 알아차렸을 것이다. 제자들의 믿음조차 확신하지 못한 스승을 위해 어떻게 목숨을 걸고 따를 수 있었겠는가? 차라리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라고 하였다면 기꺼이 스승을 따랐을 것이다.

그렇게 소태산의 명령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비겁한 도피자로서, 한 젊은 종교인의 꾐에 빠져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는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스승을 따를 수 있었던 9인 선진들의 확신은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하느님으로부터 사랑하는 어린 자식을 번제로 바치라 하였을 때 아브라함이 느꼈을 심정처럼, 아무런 한 일도 없는데 '목숨을 내놓으라'는 스승의 섬뜩한 명령을 9인 선진들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을까?

'백지혈인의 이적'이 있고 난 이후, 대종사께서는 제자들에게 '법명'과 '법호'를 내려 주면서, "세속의 이름을 가진 사람은 이미 죽었고, 이제 세계 공명(公名)인 새 이름을 주어 다시 살리는 바이다"라고 하였다. 스승과 제자 간의 팽팽한 줄다리기는 막을 내렸다. 소태산 당신에 대한 믿음을 시험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 각자의 세속적인 삶, 무의미한 삶, 욕망에 집착하는 삶, 소아적인 삶을 정말 청산할 수 있는가를 시험한 것이었다. 세속적 인간의 죽음을 통해 종교적 인간으로 부활하는 바로 그 마지막 순간을 소태산은 '백지혈인의 이적'으로 장식한 것이다. 

원불교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이러한 사실을 새삼 꺼내는 이유는 단순히 백년이란 숫자가 주는 감상에서가 아니다. 3. 1 운동 당시 대종사께서는 왜 제자들과 함께 민족독립의 길에 뛰어들지 않고, 산중기도를 택한 것인 지에 대해 오래된 의문을 풀어보기 위함이다.

〈대종경〉 서품 15장에서 대종사는 "이제 우리가 배울 바도 부처님의 도덕이요, 후진을 가르칠 바도 부처님의 도덕이니, 그대들은 먼저 불법의 대의를 연구해서 그 진리를 깨치는 데에 노력하라"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새롭게 거듭난 삶, 가장 인간다운 삶, 정신개벽을 통해 물질을 활용할 수 있는 삶은 다름 아닌 부처님의 도덕을 일상의 삶 속에 구현하는 데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내 마음을 떠나 존재하는 부처님, 일상생활을 떠난 산중불교, 불상을 숭배하는 기복불교, 출가자 중심의 불교가 아닌 생활 속에서 불법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새로운 불교, 새로운 종교의 형태를 밝힌 것이다.

실로 기성종교의 틀을 뛰어넘는 혁명적인 발상을 제시한 것이다. 원불교는 세속화를 추구하는 종교가 아니다. 불법의 세속화를 통해 세속적 삶을 성스러운 삶으로 전환시키는 속의 성화를 추구하는 종교이고, 궁극적으로 성속불이(聖俗不二)를 추구하는 종교이다. 그것이 바로 다름 아닌 '백지혈인의 이적'을 통해 보여준 인간적인 삶의 길이다.

/충남대학교·한국선학회 회장

[2019년 4월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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