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오덕진 교무] 지도인은 공부인이 자신을 일원상의 진리인 대소 유무의 이치로 원만하게 보도록 비춰주는 거울입니다. 그래서 감정과 해오는 공부인이 지도인에게 수동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얻는' 것입니다. 또한 공부인의 질문에 지도인의 진리적 해석이 더 선명해집니다. 지도인과 공부인은 마음을 공부하며 영생을 함께 걷는 도반입니다. 

▷공부인: 요즘 여대생들 사이에서 '탈코르셋'이 번지고 있습니다. '탈코르셋'은 사회에서 '여성스럽다'고 정의해온 것들을 거부하는 거에요. 짙은 화장, 렌즈, 긴 생머리, 과도한 다이어트 등을 하지 않는 겁니다. 이러한 운동이 확산되는 것은 환영하지만 "넌 왜 화장해? 너 페미니스트 아니구나"라는 말을 들을 때면 갇힌 기분이 듭니다. 자유롭지 못하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요.

▶지도인: ○○ 공부인이 마음의 자유를 경험하려나 봅니다. 에리히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인간이 불안에 사로잡힌 나머지 자유로운 인간이 아니라 자동인형 같은 인간이 되고 싶어 한다고 말합니다. 

'탈코르셋'은 미디어가 만들어낸 여성 이미지에서 벗어나서 자유롭게 살자는 운동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마음을 놓치고 맹목적으로 따른다면 이 또한 자유로부터 도피하는 것이겠죠. 

▷공부인: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여대생들 사이에서 의식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었던 게 보이네요. 제 마음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했군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마음의 자유를 얻을 수 있을까요? 

▶지도인: '마음의 자유'라는 말이 참 좋습니다. 그냥 자유가 아닙니다. 무엇에서 벗어나야 얻어지는 자유가 아닙니다. 똑같은 상황에서도 시비 이해를 삼켜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천도법문〉, 〈참회문〉, 〈무시선법〉의 핵심이 바로 마음의 자유입니다.

소태산 대종사께서 가르쳐주신 선은 무조건 비우고 없애는 식의 무거운 선이 아닙니다. 참회 또한 죄보다 더 무서운 죄의식을 심어주는 참회가 아닙니다. 

자기를 만나서 마음의 자유를 얻게 하는, 새 생활을 개척하는 첫걸음을 떼는 기쁨입니다.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위장한 자신이 아니라 적나라한 자신을 반갑게 만나는 일입니다. 

그러려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탐진치(貪瞋癡)를 온전하게 마주하고 공부해야 합니다. 탐진치가 나면 안 된다고 죄의식을 가지고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탐진치를 통해 마음의 자유를 얻게 될 것을 알기에 온전히 기쁘게 만나면 됩니다. 

탐심은 가지거나 차지하고 싶은 마음, 자기 뜻에 잘 맞는 사물에 집착하는 것을 뜻합니다. 진심은 자기 마음에 맞지 않는 것을 분하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치심은 현상이나 사물의 이치를 파악하지 못하여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번뇌를 말합니다. 

소태산 대종사께서 말씀하신 어리석음(愚)이 치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소 유무와 시비 이해를 전연 알지 못하고 자행자지하면 현상과 사물을 올바르게 판단하지 못해 번뇌가 생기게 됩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탐진치를 만날 때 무거운 죄의식으로 바라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탐심과 진심과 치심을 마주하는 것은 새 생활을 개척하는 첫 걸음이니 정말 기쁜 일입니다. 그 기쁨을 만끽하며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이 경계에서 무엇에 집착하고 있는가? 내가 이 경계에서 무엇이 내 마음에 맞지 않아 분하게 여기고 있는가? 내가 이 경계에서 대소 유무와 시비 이해를 전연 알지 못해서 내 생각대로 판단하며 행동하고 있는가?' 잘 만나면 됩니다. 

'내가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건만 경계를 따라 강하게 집착하고 있구나, 경계를 따라 내 마음에 맞지 않아 분해하고 있구나, 경계를 따라 대소 유무와 시비 이해를 전연 알지 못해서 올바르게 판단하지 못하고 있구나' 알아차리면 됩니다.

그래서 상황 따라 능히 화장을 해도 안 해도 마음이 편안한 '마음의 자유를 얻는 공부'가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화장을 해도 하지 않아도 남을 비난하거나 자신을 자학할 수 있습니다.

[2019년 4월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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