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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의법향] "종교는 사회적 이슈에 지혜와 답 주지 못할 때 사라진다는 것이 공통점"
[선진의법향] "종교는 사회적 이슈에 지혜와 답 주지 못할 때 사라진다는 것이 공통점"
  • 정성헌 기자
  • 승인 2019.05.15
  • 호수 19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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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산 김성철 원로교무

[원불교신문=정성헌 기자] 재작년 문화체육관광부가 올해의 우수도서로 선정한 <한국신종교대사전>. 한국 500개 교단의 교조와 교리, 역사, 문화 등 두루 섭렵해 해설한 이 사전은 2016년 발간될 당시 조선일보.한국일보.경향신문.서울신문.문화일보.중도일보.매일종교신문.서울경제.매일경제 등 주요일간지를 비롯해, 연합뉴스TV.연합뉴스.민중의소리.뉴스천지.천지일보.개벽신문 등과 네이버.다음 포털 뉴스까지 대대적인 소개 뉴스가 이어졌다. 언론계에서 사전 하나가 이같이 큰 이슈로 등장하게 된 이면에는 일제강점기부터 지금까지의 신종교에 대한 일목요연한 정리부터 종교계 흥망성쇠의 통찰을 담아낸 방대한 자료는 없었기 때문이다.

교학과 신종교 연구에 평생을 바쳐왔던 매산 김성철 원로교무(81.梅山 金聖徹).  2016년 7월22일자 조선일보 김한수 종교전문기자가 '신흥종교 창립과 쇠퇴엔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란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모든 종교는 창시자가 오랜 기도생활을 통해 특별한 능력을 갖게 되면서 시작되고, 사회적 이슈에 지혜와 답을 주지 못할 때는 사라진다는 점이 공통점이다. 특히 제도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인재양성을 하지 못하는 종교는 대부분 사라졌다."

주경야독의 시작
김 원로교무는 1938년 전남 영광군 군서면 학정리 대천부락 신촌에서 부친 김평국 선생과 모친 진대도화 여사의 5남3녀 중 막내로 출생했다. 일제강점기 말에 태어나 한국전쟁까지 겪었던 그는 배움에 목말랐다. 당시 신흥교당 서세인 교무 인도로 원불교를 알게 된 그는 교당살림 뒷바라지로 농사일을 도우며 숙세의 인연을 키워갔다.

"낮에는 농사일하고 저녁에는 마을 아이들과 같이 <명심보감>을 열심히 공부했지. 16세때나 되었을라나. 그때 원불교에 가면 중학교를 갈 수 있다고 해서 난생 처음 송정리에서 기차를 타고 익산을 왔는데, 거기가 원광고등공민학교였어."

원광고등공민학교는 정식으로 인가받은 중학교가 아닌 야간 중학교였다. 낮에는 익산보화원에서 일하고 숙식을 해결하며 밤에 중학과정을 마쳤다. 원광고등학교까지 다니면서 어려운 보화원 생활을 6년이나 견뎠다.

"그때 익산교당 학생회장도 하고, 전국연합회 학생회장도 했지. 처음에는 육군사관학교를 가고 싶었는데 큰형님이 남로당 운동하시다 돌아가셔서 연좌제로 안됐어. 낙심하다가 그동안 생활하면서 보아온 전무출신 삶도 괜찮겠다 싶어서 서원을 세우게 됐지."

추천과 보증은 당시 보화원 원장이었던 의산 조갑종 교무가 했다. 간사생활을 하지 않은터라, 반공비생으로 추천받았기 때문에 신용양로원 서기로 발령받아 조력하면서 학업을 이어나갔다.

일년 일찍 부교무 발령
원기49년 남원교당 부교무로 발령받았을 때는 아직 4학년이었다. 당시 전국적으로 대규모 데모가 벌어져 학교는 휴교상태였고, 총무부장이었던 다산 김근수 교무가 남원교당에 사정이 있다며 1년 일찍 부교무로 발령낸 것이다. 부교무 생활을 시작하면서 시험기간에는 학교로 돌아가 시험을 치뤘다. 당시 주임교무로 양산 김중묵 교무를 모시며 700평 넘는 교당 마당과 화단 청소, 산위에 위치한 교당까지 물퍼다 나르기, 청년회결성 운영, 학생회 운영 등 부교무 생활을 딴딴하게 헤쳐나갔다.

"당시에 기억나는 일은 부임하고 얼마안되서 KBS남원방송국에 근무하는 청년회원이 매주 일요일마다 10분씩 원불교 방송을 하자고 해서 2년동안 방송 설교를 했지. 그리고 양산 종사께서 젊어서부터 위 무력증을 앓고 계셔서 늘 몸을 움직이셔야 했어. 그래서 주로 탁구를 함께 했는데 아침 좌선 끝나면 '탁구 한판하세'하셔. 탁구하고 아침 먹고 나면 또 '가세'하시지. 점심 먹고 얼마 안있다가 '한판하세' 그러셔. 그렇게 하루종일 탁구 친 일도 있었네."

학문의 길 오십년
그는 원기51년 김중묵 교무의 주선으로 원광대학교 도서관 근무를 시작했다. 8년간 사서.사서과장으로 근무하면서 기존의 수십만 권에 달하는 도서 분류 체계를 PKDC(박봉석 분류표)에서 KDC(한국십진분류표)로 바꿔 재정리했다. 하루 50~100권씩을 5년간 집요하게 매달렸는데 이 작업으로 원광대학교 도서관 시스템 현대화 작업의 기초가 됐다.

"그때 참 바쁘게 보냈지만 밤에는 꼭 책을 읽었지. 또 학생시절 류기현 교수님을 알게 돼 도서관 근무하면서도 그분의 연구를 도왔어. 그때 한국 신종교 관련 연구를 위해 기회만 있으면 현지 답사를 교수님과 함께 다녔지."

원기59년에는 원광대학교 전임강사 발령을 받아 강의를 시작해 조교수, 부교수, 교수로 진급하면서 원기84년까지 학생교육과 원광대학교 출판국장, 대학교당 주임교무, 교학대학장, 교학대학원장, 종교문제연구소장, 원불교사상연구원 부원장 등 중요 보직을 수행하며 많은 활동을 했다. 이 기간에 석·박사 과정을 이수하고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원기77년에는 정부 해외파견 지원금을 받아 일본 경도불교대학에 객원교수로 1년간 지내기도 했다.

또 그가 출판국에 있을 때 출판국장이었던 류기현 교수와 근무하면서 영세한 지방대학 출판 상황 속에서 백여권의 교수들 전문서적을 발행해 전국대학출판국 상위권으로 발전시켰고, 원기59년 <원불교사전> 실무를 주관했다. 또 학교 차원에서 개최했던 국제 규모의 각종 학술회의가 있으면 그가 자처해 책상 배열, 현수막 걸기 등 누가 크게 신경쓰지 않는 잡무를 도맡아 주관하면서 원광대학교 학술행사의 격을 높이기도 했다.

저술활동에 활발한 활동을 보였던 그는 종교문제연구소 활동을 하면서 4차에 걸친 한국신종교실태조사, 원불교와 한국신종교에 관한 저술활동, <원불교사상논고> 발간, <한국신종교사상의연구> 발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작업 참여, <한국신종교대사전> 편찬, <한국신종교사전>.<한국민족종교문화대사전> 집필에 참여했다.

원기84년에는 원광보건대학 학장으로 취임해 4년간 근무했고, 원기85년에는 봉도 수위단원으로 피선돼 6년간 봉직했다. 원기89년에는 학교법인 원광학원으로 발령받아 <원불교대사전> 편찬실무위원장을 맡아 사전편찬업무에 종사하다가 원기92년 퇴임한다. 또 원기91년 7월 제152회 임시 수위단회에서 그를 대봉도 법훈을 서훈하기로 결의했으며, 원기100년 12월 제218회 임시 수위단회에서는 종사의 법훈을 수훈했다.

돌이켜 보면 모두가 감사
"원로원이나 수도원에서 쟁쟁하시던 분들이 일흔 살 드셨다고 퇴임해 있는 것을 보면 참 아까워. 그때가 교화 수준과 역량이 정점에 있을 나이인데, 퇴임해서 더 이상 활동을 못하고 있으면 그냥 사라지는거여. 내가 볼 때 참 아깝지."

퇴임 이후에도 활발하게 강의와 학술 발표를 이어왔던 그는 지난해 말부터 비로소 글쓰는 일을 놓았다. 그가 평생을 갈고 닦아온 학문이 이제야 빛을 발했던 것처럼, 원로교무들이 평생 쌓아온 교화역량이 정점에 다다랐지만 퇴임한 순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리는 현실이 안타까워서일까. 그는 타고난 건강에 80세가 넘은 나이에도 왕성한 활동을 할 수 있었던 데에 특히 감사하며 지난 세월을 회고했다.

"돌이켜 보면 모두가 은혜고, 감사할 따름이지. 크고 작은 어려움도 많았지만 감당 못할만큼 어려운 일은 없었어. 원불교 교역자로 활동할 수 있었음에 감사하고, 대학의 일원으로 봉사하고 학문할 수 있었음에도 참 고마운 일이여."

[2019년 5월1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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