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서양준 교무] 학교에서 아이들과 수업을 끝내거나 법회를 마칠 때면 늘 '마음공부 합시다'라는 말로 마무리하곤 한다. 그러면 간혹 나를 찾아와 "마음공부는 어떻게 하는 거예요?"하고 묻는 애들이 생겨나기 시작하고 나는 겉으로 태연한 척, 속으론 쾌재를 부르며 마음공부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게 된다.

마음공부를 설명할 때엔 멈추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한다. 한번 아무 생각 없이 가만히 있어보라고 권하면 굉장히 어색한 모습으로 열심히 시도를 한다. 그러나 해보지 않은 것이니 갑자기 시도한다고 잘될 리 만무하다. 그러면 슬슬 이야기를 시작한다. "최근에 고요하게 있어본 적이 얼마나 되니?"

학교에서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자면, 늘 바쁘다. 내 어린 시절을 비추어보아도 가만히 있는 시간보다는 무엇인가를 부산하게 하고 있었던 시간이 더 많았다. 특히 교무인 아버지를 따라 이사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새로운 학교에서 새로운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내 존재감을 알리기 위해 숨 가쁘게 활동해야 했다. 오죽했으면 세 번째 초등학교에 전학 갔을 때 아이들과 친해지기 위해 유머집을 외워 재미있는 농담을 준비하는 것이 일과였을까.

요즘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심리학에서 이야기하는 또래 집단을 형성하느라 학교는 전쟁통이다. 그러면서도 학교는 바쁘게 돌아가고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는 대학 입시에 휩쓸리다 보면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지도 못한 채, 앞으로 내달리고만 있게 된다. 어찌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길가에 핀 이름 모를 풀꽃의 향내음을 맡을 수 있으랴. 자신이 타고 있는 소가 벌에게 쏘여 내 달리고 있는데 올바른 방향으로 소를 조종할 수 있을까?

한 학생이 찾아와 공부가 잘되지 않는다고 상담을 요청했다. 열심히 하고자 하는 의지도 있었고 자그마한 목표를 정해서 조금씩 해보자고 이야기를 마쳤지만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다. 그래서 어느 날은 공부 이야기 말고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고 했다. 매일 새벽까지 책상에 앉아 있는 게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야 한다고 이야기를 시작하니 벌써 눈물이 글썽거린다. 집과 가족, 보이지 않는 압박감 등이 무수한 이야기가 쏟아져 나온다. 얼굴 가득한 눈물 자국에 내 마음마저 아프다. 최대한 의연하게 마음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고, 한번 같이 마음공부를 해보자고 말을 꺼낸다. 바로 앞을 가기 위한 공부가 아니라 잠시 멈춰 더 멀리가기 위한 마음공부를 권한다.

학교에서 교무가 있어야 하는 존재 이유는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질풍노도의 시기와 환경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질풍노도여야 한다는 부담감 속에서 나의 마음을 바라볼 기회를 주는 것. 그것이 내가 이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 아닐까?

수학시절, 마음공부란 도대체 뭐기에 구호처럼 입에 달고 사는가 했던 시절이 있었다. 배우는 것은 그저 선하고 염불하고 교리를 공부하는 것이 전부인데 나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전해주라는 말인가 싶었던 시절, 이제 와 생각하면 그 모든 고민이 마음공부의 시작이고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첫 출발점이었구나 싶은 감상이 든다.

/원광여자중학교

[2019년 7월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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