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원불교새등이문화원 최현천 교무

[원불교신문=이여원 기자] '해를 가장 먼저 맞이하는 동쪽'에 자리한 새등이문화원. 물(水), 불(火), 흙(土), 바람(風)으로 도자의 생명을 탄생시키는 이곳에 그가 있다. 도자기도 만든 사람을 '닮아' 태어난다고 했던가. 투박하지만 깊고, 화려하지 않지만 우러나는 기품이 담긴 다완(茶碗), 그를 꼭 닮아 있다. 지산 최현천 교무, 어쩌면 그의 일상이 이렇듯 무심의 경지일 터. '사람꽃'인 그를 만나러 가는 길에 하늘도, 나무도, 들판도 자연 안에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이 된다.  

정호다완과 무초 최차란
아침 일찍 출발한 취재 길이지만, 경주 토함산 기슭에 자리 잡은 새등이에 도착했을 때는 때 늦은 점심시간. 텃밭에 심고 가꾸는 재료들로 직접 찬을 만들고, 밥을 지어 식사를 공양하는 그. 밥 짓는 일이 흙을 빚는 정성과 다르지 않음을 문득 일깨운다.

평생 흙과 함께 한 무초 최차란(無草 崔且蘭·법명 경천) 선생을 기리기 위한 공간, 무초지선당(無草地禪堂)으로 자리를 옮겼다. 담담하게 차를 우려내는 그가 가슴 속 스승에 대한 그리움을 앞서 꺼내 놓는다.

"스승님은 동학 최수운 대신사의 후손으로 3대째 옹기를 굽는 집안의 딸로 태어났다. 손재주가 뛰어난 데다 양재 기술에도 능했던 스승님은 1968년 부산 극동호텔 안에서 민예사를 운영하면서 전통 도자기류와 골동품 등 문화재 분야에 관련한 공부를 많이 하셨다고 들었다." 

"스승님이 차 사발 만들기에 정성을 쏟게 된 계기는 1970년부터 일본 관광객들이 특히 많이 찾던 경주로 올라와 '우미민예사'를 차리게 되면서 출발하게 된다. 특히 스승님이 한국 차 사발에 매료되기 시작한 계기는 일본 동경국립박물관에서 열린 정호다완(井戶茶碗) 전시회를 관람하던 중 조선의 도자기 사발이 일본의 국보로 지정된 사실에 감탄하면서 크게 깨달음을 얻으셨다." 
무초 선생은 1971년 우연히 도쿄박물관에서 일본 국보가 된 조선초기 막사발(정호다완)을 만난 뒤 1974년 새등이요(史等伊窯)를 설립, 막사발 재현에 일생을 바쳤다. 

김성근 교무가 무초 선생과의 인연으로 당시 학림사 사감이었던 이성택 교무와 인연을 맺게 해줬고, 대산종사로부터 '경천(慶天)'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무초 선생은 자신이 깨달은 우주의 회전원리와 일원상 진리가 상통함을 알고 자신의 다도 문화와 전통도자 철학이 원불교에 꽃피우길 희망했다. 선생이 2002년에 토지 7834.7㎡와 건물 10동(당시 시가 25억 정도)을 교단에 희사하면서, 같은 해 새등이문화원 설립 배경이 됐다. 

스승을 향한 지극한 봉공
2000년에 스승을 만나, 18년 동안 무초선생의 사상과 예술혼을 전수받아 스승이자 부모로 각별한 인연을 쌓아온 그. '막사발은 놓고 보면 당당하고, 들고 보면 우아하고, 사용하는 사람의 마음과 같이 변화한다'는 스승의 가르침은 엄격했고, 단호했다. 그는 전통방식을 철저히 고수하며 조선도자의 맥을 잇기 위해 모질게 인고의 시간을 견뎌냈다. 

지난해 3월 스승이 열반하기까지 그는 스승의 오랜 투병생활도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다. "스승님께 내가 보은할 수 있는 길은 인간적인 공양 밖에 없었다"고 말하는 그. '제자는 스승을 거짓 없이 지성으로 모셔야 한다'는 무초선생의 당부를 그는 무던하게 실천했다. 힘든 작업과정 속에서도 하루 세끼 스승을 위한 식사 공양을 허투루 한 적이 없다. 투병 말기에는 정신력이 약해진 스승 곁에서 꼬박 밤을 세우며, 속울음을 운적도 여러 날이다. 

"18년간 함께 쌓아온 세월에 원도 한도 없이 정을 나눴다"는 그. 향타원 박은국 종사와 법타원 김이현 종사, 두 분 스승이 안계셨다면 몇 번이고 포기할 수 있었던, 그 지난했던 시간. 말로 다 전할 수도, 어찌 표현할 수도 없는 무초선생과의 애잔한 세월을 회상하는 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단순한 일상, 그대로가 온전한 수행
그는 도자기 빚는 일을 '백지에서 시작했다'고 말한다. 스승 밑에서 처음 발 물레질을 했던 때가 그의 나이 서른하고도 아홉. 늦은 나이였지만 그는 '하루 작업에 열흘 정성'을 들여 일심으로 흙을 빚었다. 

새등이문화원에서 제작하는 도자기는 화공 약품을 사용하지 않고, 기계도 사용하지 않는다. 발 물레, 자연 유약, 장작 가마로 4박 5일 동안 밤을 새우며 공심(空心)과 공력(空力)으로 도자기를 빚는다. 

"발 물레 찰 때 조금이라도 잡념이 들면 안 된다. 도자기는 빚는 사람의 마음이 그대로 표현된다. 마음이 편안하고 풍만하고 자연스러워야 도자기도 편안하고 풍만하고 자연스럽다" 그가 빚어내는 그릇이 투박하고 거칠면서도 풍만하고 자연스러운 이유다. 

오랜 체험을 통해 물, 불, 흙, 바람의 특성을 꿰뚫어야 하고 무심의 경지에 이르러야, 한 점 사발이 생명을 갖게 되는 도자의 경지. 도자기 빚는 일이 '수행과 둘이 아님'을 전하는 그의 일상은 지극히 단순하다.'새벽 4시45분 기상, 기도정진, 아침 작업, 아침밥 짓기, 오전 작업, 점심식사, 한 시간 휴식 후 오후 작업, 저녁밥 짓기, 저녁 작업, 심고.' 가만히 들여다보면 '기도하고 밥 짓고 작업하기'가 전부인 온전한 하루, 그대로가 온전한 수행이다.  

"혼자 흙 만들고 성형하고 가마에 불을 땔 때 선심이 된다. 나도 없고 너도 없다. 오직 작업뿐이다." 일심(一心), 일작(一作)으로 만든 그의 작품은, 편안하고 풍만하고 자연스러운 그의 내면을 닮아 있다.

새등이문화원의 천일 불사
그가 '온전한 새등이문화원 터전 마련을 위한 1000일 기도'에 들어갔다. 무초 선생이 열반하면서 새등이문화원 주변 임야 6천여 평이 선생의 유족에게 상속됐고, 최근 이 땅이 매물로 나왔다. 생전에 무초 선생은 "이 땅을 매입해야 '온전한' 새등이가 된다"고 그에게 당부했다. 

그는 새등이문화원 천일 불사의 세 가지 뜻을 전했다. "스승님이 새등이문화원을 교단에 목적 희사한 뜻인 차도와 전통도자 기술, 철학을 발전적으로 이어가기 위함이다. 또한 스승님이 황토방을 손수 지어 암을 극복해낸 곳이기 때문에, 황토방과 편백나무숲으로 이루어진 휴양소를 만들어 몸과 마음이 아픈 재가출가 교도님들이 편히 쉬어가게 하고 싶다. 여력이 된다면 연로한 교도님들이 모여서 살 수 있는 소박한 신앙공동체를 만들고 싶다"는 게 깊고 간절한 그의 바람이다. 

행여 교단에, 재가출가 교도들에게 부담으로 전해질까,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는 그가 용기 내서 전한 새등이문화원 천일불사. 도자기를 빚듯, 그의 '온전한' 천일기도가 시작됐다.

[2019년 7월1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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