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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엄하게 육신을 떠날 권리
존엄하게 육신을 떠날 권리
  • 이성하 교무
  • 승인 2019.07.24
  • 호수 19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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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적 자유와 생의 자기 주도권은 절실한 인간 욕구
내 삶의 주체인 내 자신이 생애 마무리 준비하고 생각해둬야
이성하 교무 / 샌프란시스코교당

[원불교신문=이성하 교무] 한 동안 말기 환자들을 방문하는 자원봉사를 한 일이 있었다. 주로 치매가 심한 노인이거나 건강이 위중해 말기 상황에서 요양원에 있는 분들이었는데 공통점은 모두 가족이 있되 방문자가 없다는 것이었다. 아무도 방문하지 않기 때문에 봉사자들이 방문해 이야기를 나누거나 책을 읽어 주거나, 음악을 듣는 등의 소소한 친구 역할을 하는게 임무였다. 

내가 처음 방문한 미치코라는 일본계 미국인 할머니는 가벼운 치매가 있다는 설명을 들었지만 막상 만나니 멀쩡하신데다가 자존심이 굉장히 강하신 분이었다. 아주 작은 선물 하나도 완강히 거부를 하시는 게 동정을 받는다는 생각을 하시는듯 했고 몇 달을 방문해도 낯선 봉사자의 방문 자체를 불편해 했다. 늘 외로워보였고 마음을 닫은 까닭에 더욱 외로워 보였다. 

다음에 만난 베스라는 할머니는 96세 였는데 이 분도 치매와 독립적인 활동이 불가능하여 요양원 생활을 하고 있었다. 모든 가족이 샌프란시스코 주변에 살고 있었지만 본인이 연로한 만큼 자녀들 또한 연배가 높았고 그들도 형편상 자주 방문할 수는 없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방문한 날 오후에 열반했다. 다행인 것은 두 분 다 연명 치료를 할 형편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더 이상의 긴 고통은 없었다는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는 늘 생각이 깊어진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가족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한동안 머릿속을 맴돈다. 두 분 다 세끼 꼬박 꼬박 나오고 간호사가 일상을 살펴 주는 요양 시설에서 살다 가셨다. 사람들은, 그래도 말년을 누군가가 보살펴 주는 시설 속에서 편안히  살다 가셨으니 감사한 것이 아니냐고 한다. 당연히 국가와 사회에 너무나 감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란 게 안전한 환경에서 의식주를 편안히 제공 받는다고 삶에 만족하거나 행복을 느끼는 존재들이 아닌지라,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는 삶은 더욱 공허해지고 의미를 잃게 된다. 신체적 자유와 생의 자기 주도권은 안전한 환경과 긴 수명보다 더 절실한 인간 욕구인 것이다. 

건강이 좋아지고 수명이 길어지는 만큼 노년의 시절도 길어진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한계를 안고 사는 일이기 때문에 어느 순간 육신이 허물어지는 시절이 오고 그때는 어쩔 수 없이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데 그때도 자식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자력을 잃은 몸이야 의료 서비스에 의탁하여 맡기고 산다 하여도 내가 남은 시기를 어떻게 살다가 죽을 것인가의 결정권을 의료 전문가에 맡길 수는 없는 것이다. 

육신을 떠나야 할 때, 우리는 모두 존엄하게 품격을 잃지 않고 떠나고 싶다. 품격 있는 마무리에는 당연히 준비가 필요하다. 그 준비는 평상시 젊고 건강했을 때 모든 인간에게는 끝이 있다는 단순한 사실을 직시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그리고 문서로도 자신의 삶을 어떻게 마무리 하고 싶은지를 자주 이야기 하고 남기는 것이다. 삶을 더 지속시킬 수가 없을 때 음식도 물도 치료도 필요 없이 삶의 마무리를 선택하는 존엄사는 의료적 윤리에 앞서 개인의 권리이다.

삶이 유한하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우리 삶은 더욱 명료해지고 단순해진다. 예일 대학의 죽음학 강의로 유명한 셀리 케이건 교수는 현재를 살고 있는 모든 이에게 해당되는 유일한 진리가 죽음이며, 인간이 죽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직시할 때 시간이 영원할 것 같은 착각에서 벗어나서 삶에 대한 진정성이 살아나며 삶의 동기와 근거를 찾게 된다고 말한다. 그는 20대 청춘들에게 25년째 죽음학을 강의하고 있다.

생의 마지막 시기가 가치있는 시간, 깊이와 존엄이 함께 하는 시간이 되기 위해서는 내 삶을 살아온 주체인 내가 어떻게 내 생애를 마무리 하고 떠날지를 준비하고 생각해둬야 하는것 같다. 인간의 수명이 길어지고 있다는 게 오로지 축복만이 아닌 것은 삶이란 것이 질의 문제이지 양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대종사는 40세부터는 죽어갈 보따리를 챙기기 시작하라고 했다. 우리 인생에서 죽음이 그리 먼 이야기가 아니라는 뜻이며 우리 삶이 한창 꽃필 무렵부터는 반드시 생각할 일이라는 뜻일 것이다. 

/샌프란시스코교당

[2019년 7월2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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