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산 오성수 원로교무

[원불교신문=정성헌 기자] 은산 오성수 원로교무(85·銀山 吳聖洙). 그는 1934년 전라북도 진안군 성수면 구신리에서 부친 오두환과 모친 수타원 윤지정화 사이에 4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유복했던 아버지는 교회 목사였다. 배움의 뜻이 컸던 아버지는 한학으로 마을 서당까지 운영했다. 만족하지 못하고 서울로 상경했다. 당시 미국에서 선교하러 나온 목사 남매를 만나 관촌에서 교회를 짓고 전도사 활동을 했다. 이후 함경도 원산에 정식 목사로 발령받아 선교활동을 했는데 안타깝게 33세 나이로 순직하고 만다. 그의 나이 7세 때였다. 살길이 막막한 어머니는 4남매를 데리고 살곳을 찾아 전북 임실군 지사면 금평리로 이사를 오게 된다. 그런데 유전자전이라고 했던가. 배움에 대한 갈망이 아버지 못지 않았던 그는 향후 교회가 아닌 원불교를 만나게 된 기연으로 이끌게 된다.

무작정 익산으로 오기까지
그가 내려왔을 무렵 남원교당 훈타원 양도신 교무가 금평리로 출장 법회를 보러 다닐 때였다. 이후 앙산 조준곡 교무와 최흥화 선생이 합력해 금평교당을 신축하고 흠타원 정윤재 교무가 첫 교무로 부임했다. 그의 나이 15세때 조준곡 교무의 연원으로 원기 33년 입교하게 된다. 당시만 해도 해방된지 얼마 안되었던 때라 학교에  다니지 못한 문맹인들이 많았다. 배움에 누구보다도 목말라 했던 그는 교당에서 야학을 주도해 직접 가르쳤다. 교화에도 그는 특별한 아이디어를 냈다. 야학하러 온 아이들의 부모들을 전부 의무적으로 입교하도록 안내한 것이다. 그래서 그 마을 전체가 교도 아닌 가정이 없었다.

이듬해 한국전쟁이 발발한다. 전국이 어수선할 때였다. 그러다가 빨치산에 있는 인민군을 친구와 따라갔다. 마을 아이들은 인민군을 보고 좋아하면서 아무 생각없이 따라간 것이다. 그가 속한 소년부대는 낙동강 전투까지 참전했다가 후퇴해 지리산까지 들어갔다. 누군가 오늘 저녁에 도망가지 못하면 미군에게 잡히든지 그대로 이북으로 넘어간다는 말에 함께 들어갔던 친구와 몰래 빠져나와 우여곡절 끝에 금평리에 당도했다. 그때가 17살때였다.

이제는 군에서 징집명령이 떨어져 면에서는 나이어린 소년들도 징집에 나섰다. 특히 그는 인공군 소년부대에 갔다왔다는 소식이 마을에 알려져 징집 소식이 들려오면 제일 먼저 그에게 알려줬다. 그러다가 다시 목포에 있는 해양소년단에 들어가면 공부를 할 수 있다는 말에 그곳을 향했다. 그러나 그의 생각과 달리 군대 훈련만 시키는 곳이었다. 그는 의도한 것과 다르다는 생각에 한달 휴가를 받고 무작정 이리역까지 와버렸다.

동산선원에 살게만 해준다면야
그는 당시 총부나 교당은 몰랐지만 조준곡 교무가 보화당을 내왕했다는 사실을 알고 익산 지역 보화당을 찾았다. 금평교당 이야기를 하니 동산선원으로 안내했다. 당시 동산선원장으로 고산 이운권 교무가 이백철 교무, 이종원 교무와 함께 있었다. 동산선원에서 하루밤 자고나니 '이곳이 내가 살곳이구나' 생각이 들자 어렵게 말을 꺼냈다. 식비와 선비를 인편으로 집에서 조달받아 바로 선을 났다. 그러나 1년 이상 이곳에 지내다보니 벌이가 없이 집에서 가져다 쓰기만하니 어머니와 동생들 생각에 장남으로서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그는 이운권 선원장에게 이런 고민을 털어놓으니 "수계농원으로 가라. 거기는 낮에 임원으로 일을 하면 밤에 무료로 가르쳐준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동산선원에서 일을 할테니까 살게 해달라"며 간절히 부탁했다. 그동안 동산선원에 정이 든 것도 사실이지만 다른 곳의 정서도 잘 몰랐으니 이곳을 벗어난다는 것은 마치 백척간두에 서있는 심정이었다. 그러자 이운권 선원장은 "지금까지 같이 공부하다가 누구는 공부하고 너는 똥지게 지고 살 수 있겠냐"는 말에 그가 자신있게 대답하니 동산선원 간사로 살 수 있게 됐다. 그는 똥지게는 물론 2천5백여㎡에 달하는 밭농사, 채소농사도 혼자 해내면서 선원에 식량을 조달했다.

"어린애가 그런 일을 다 해내니까 고산종사께서 나를 참 예쁘게 보셨어. 한 4년하고 나니까 나를 당시 전주교당에서 만든 양로원 총무로 발령내셨어. 거기서도 3년 있다보니까 고산종사께서 나를 가르쳐야 되겠다 마음을 내셨나봐. 다른 사람 보낼테니 이제 원광대학교에 와서 공부하라고 그러셔. 거기서 야학으로 1년, 교학과 3년 공부했지."
 

"불생불멸과 인과보응 이치를 모르면 
살면서도 자기 감정에 흔들리기 쉬워"
"영생이 있고 인과가 있는데 선을 안할 수도 없고,
교전을 안볼 수가 없고, 실천을 안할 수가 없는거야"

대산종법사의 큰 가르침
이후 원기56년 동산선원 총무로 임명받았지만 가정 형편이 많이 어려웠다. 모시던 어머니가 병약하신데다 결혼한 이후 용금으로 애들을 키울 엄두가 나지 않아서였다. 하는 수없이 대산종법사를 찾아 가정사를 설명하며 "형편이 나아지면 다시 돌아오겠습니다"는 말씀을 올렸다. 대산종법사는 "한번 생각해보자"고 하더니 며칠 후 송대로 오라는 전갈을 받았다.

대산종법사는 "사람이 작은 효에 얽매이면 큰 효를 놓치게 된다. 한번 전무출신으로 서원을 했으니 부모님을 희사위에는 모셔드려야 하지 않겠느냐"며 "너는 앞으로 한의원을 한번 해보아라"고 했다. 서울, 이리, 전주, 대전, 부산에는 한의원이 있는데 대구에는 없으니 그곳에 새 보화당을 개척하라는 말씀이었다.

대산종법사는 어느날 그를 신도안으로 다시 불러 대중들에게 "오늘은 성수를 위해서 법회를 보자. 너의 이야기를 해봐라"고 하자 그는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했다. 이야기를 다 들은 대산종법사는 "앞으로 성수가 대구에 가서 한의원을 하게 될 것 같다. 우리 박수 쳐주자"며 대중과 함께 박수를 쳤다. 그래도 용기가 안나자 그는 "저는 한의원에 대한 상식이 전혀 없습니다" 말씀드리니 대산종법사는 "이놈아! 너는 한의원을 잘 지키고 심부름만 잘하면 교단이 다 알아서 해줄 것이니 염려말고 부산보화당에 가서 견습하면서 대구에 한의원 자리를 물색해 보아라"고 했다. 당시 교단에서는 대구에 보화당을 내는 것에 반대했다. 경제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대신 광주에 내자는 의견이 분분했다.

그는 틈나는대로 부산 보화당에 일을 배우면서 대구 점포 자리를 물색하던 중 대구 남성로 약전 골목 입구에 목조 이층건물이 허술한 것이 하나 있어 교단과 상의해 자선사업회 기금 일부와 법은사업회 기금으로 매입하고 신축공사를 시작했다. 마침 그 무렵 대구교구에서 대법회를 열기로 하자 대산종법사는 이곳을 내방한다. 대산종법사는 "자리도 좋고 잘했다. 이 한의원은 너 때문에 시작된 것이니 잘해보아라. 이 한의원이 잘되면 정산종사께 보은하는 길도 되고 너희집 일도 잘 풀릴 것이다"고 그를 격려했다.

그는 약전골목의 텃세에도 굴하지 않고 모두가 쉬는 일요일에도 보화당을 열며 단골을 하나둘 늘려나가며 후진 양성에도 힘을 써 지금의 대구보화당을 자리하게 했다.

복지시설도 교화가 필요해
원기72년 그는 삼정원에서 복지시설 최초로 당시 금지사항이었던 종교시설로 법당 봉불식을 거행하며 대한민국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더욱이 당시 숙식만 제공하던 복지계 현실을 벗어나 좌선, 기도, 법회로 환자들의 정신 건강에도 효과를 입증하자 KBS 방송에서도 촬영했다. 원기75년은 이리보육원장으로 부임해 아이들에게 사랑을 일깨우는데 주력했고, 원기82년 자선원에 부임해서는 법회와 기도로 교화, 중환자실 별도 마련, 반장제도운영 등 원내 자치제도로 원생들의 자활능력을 크게 신장시켰다.

영생이 있고 인과가 있다
"나는 어려서부터 배움에 굶주려 방황하다가 동산선원에 와서 정착하게 됐어. 교전을 보고 공부하다보니 어느 법문 소중하지 않는 게 없지만 인과품16장이 제일 크게 와닿았지. 거기보면 '모든 사람에게 천만 가지 경전을 다 가르쳐 주고 천만 가지 선(善)을 다 장려하는 것이 급한 일이 아니라, 먼저 생멸 없는 진리와 인과 보응의 진리를 믿고 깨닫게 하여 주는 것이 가장 급한 일이 되나니라'고 하신 말씀이 처음부터 지금까지 깊이 새기고 있지."

그는 말을 계속 이었다. "불생불멸과 인과보응의 이치를 모르면 살면서도 자기 감정에 흔들리기 쉬워. 그런데 영생이 있고 인과가 있는데 어떻게 자기 감정대로만 살 수 있겠나. 자연히 내가 선을 안할수도 없고, 교전을 안볼 수가 없고, 실천을 안할 수가 없는거야. 후진들에게 이말을 꼭 들려주고 싶네."

[2019년 9월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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