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윤관명 교무] 소태산 대종사는 "종교와 정치는 한 가정에 자모(慈母)와 엄부(嚴父)같다"고 했다. 종교의 역할은 도덕에 바탕해 자애로운 어머니가 자녀를 살피는 마음으로 지도하고, 정치는 일의 결과를 보아 법률에 근원하여 엄한 아버지와 같이 상벌을 분명하게 베풀어야 한다는 뜻이다. 

지금 한국사회는 진보와 보수, 여당과 야당이 정치적 공방으로 국론을 분열시키고 정치혐오를 부추기고 있으며, 극우보수 종교는 이익을 쫓아 정치화 되고 있으니, 종교와 정치가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지 의문을 갖게 된다. 우선 종교와 정치는 국민의 정신 지도를 위해 표리(表裏) 병진(竝進)해야 한다. 종교는 정치가 중도를 벗어나는 것을 경책하고, 정치는 원만한 도덕을 밝히는 건전한 종교를 장려하여  국가 만년 대계에 하나가 되어야 한다. 정치는 연령과 지역에 따라 성향 차이가 뚜렷해  종교인의 정치적 판단과 발언이 매우 조심스럽다. 그러나 우리는 정치를 멀리 할 것이 아니라 정치가 올바른 역할을 하고 있는지 소태산의 눈으로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원불교는 어떤 기준으로 종교와 정치를 판단해야 하는가. 정산종사는 "세간에서 우리 교단을 좌니 우니 하고 평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으나, 그는 종교의 대의를 모르는 말이다. 종교는 근본 마음을 가르친다는 말이요, 근본 마음이란 도덕심인데 여기에 어찌 좌우가 있겠는가. 또 본교의 사대 강령 가운데 하나가 무아봉공이 아닌가? 내가 없는데 어디에 좌우가 있으리요"(〈한울안 한이치에〉 돌아오는 세상 53절)라고 설한다. 우리는 도덕심을 기준으로 좌우에 치우치지 않는 무아봉공 즉 공익정신으로 살아가자는 것이다.

무아(無我)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실무아(眞實無我)다. 일체 사욕을 떠나서 국가와 세계를 위해 사는 것이다. 진실무아의 무아는 '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더 큰'나'를 발견하고, 진리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일시적 개인 이익보다 장기적 전체 이익을 추구하는 공익정신이다. 둘째는 수세무아(隨勢無我)다. 수세는 그때그때의 형편이나 상황에 따름을 말한다. 자신의 이욕을 위해서 수시로 원칙이 바뀌는 것이다. 때문에 나의 이익을 위해 공익에 해를 끼치게 된다. 세째는 맹종무아(盲從無我)이니 자기의 주견과 비판이 없이 맹목적으로 흔들리는 것이다. 대종사가 말한 물질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노예생활로 사는 것이 바로 수세무아와 맹종무아다. 스스로 작아지고 고립된 '나'로 사는 것이다.

소태산 대종사는 원기4년에 영광군 백수면 궁촌벽지에 첫교당을 세우고 그 이름을 대명국영성소 좌우통달 만물건판 양생소(大明局靈性巢左右通達萬物建判養生所)라 지었으니, 그 뜻은 "크게 밝은 판국인 영성의 집이며 만사 만물을 걸림없고 치우침 없이 판단하여 키우고 살리는 곳"이다.

생각해 본다. 소태산이 바라던 '대명국영성소'가 마을 속 섬이 되고 있지는 않은지 말이다. 이제 우리는 '진리적 종교'와 '사실적 도덕'으로 세상을 밝히고 영성을 살리는 종교의 역할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불신의 정치를 도덕정치로 바꾸기에 함께 힘써야 하겠다.

/동창원교당

[2019년 9월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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