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당은 타인과 교류하는 사회적 건강을 기르는 곳
대중에게 이익 되고 환영과 보호 받는 사람이 되길

[원불교신문=김수영 교도] 최근 인간의 최대 수명에 관한 기사를 보았다. 기네스북에 등재된 122세를 근거로 125세가 한계일 것이라는 주장과 150세는 될 것이라는 설이 있었다. 1960년에 남녀의 평균 수명이 51세와 54세이던 것이 최근에는 남자가 79세, 여자가 85세 정도라고 하니 의학의 발달과 생활습관 개선 등의 영향으로 인간의 평균수명은 앞으로도 더 늘어날 가능성이 보인다. 건강은 모두의 관심사이다. 필자도 건강에 대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된 특별한 경험이 있다. 1981년 3월, 갓 입학한 대학에서 학교생활에 적응해가던 어느 날 들었던 교양체육 첫 시간을 지금도 기억한다. 

강단에 오른 교수님이 칠판에다 '건강이란?'이라고 쓴 후, 학생들에게 건강이 무엇인지 물으셨다. 솔직히 말하면 그 때 나는 이런 생각을 했었다. "아니! 건강이 뭔지도 모르는 대학생이 있나? 대학에서 가르치는 게 이런거야?"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올 정도로 너무나 치졸한 생각이었지만, 한창 부풀었던 대학생활에 대한 기대감을 깨트리는 정말 실망스런 질문이었다. 시큰둥하게 앉아 있다가 몇 사람의 대답을 듣고 난 교수님이 칠판에 써내려가는 글을 읽으면서 나는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교수님이 쓴 문장은 대강 이러했다. 

"건강이란 단지 질병이나 허약함이 없는 것이 아니라 신체적, 정신적 및 사회적으로 완전한 상태를 말한다." 이것은 세계보건기구에서 정한 건강에 대한 정의였다. 그 때까지 만해도 신체적 건강과 정신적 건강 밖에 생각을 못했던 필자는 '사회적 건강'이란 단어가 생소하면서도 무척 인상적이었다. 이후로 '사회적 건강'은 하나의 화두가 되어 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신체적, 정신적으로 이상이 없는 건강만이 다가 아님을 그 때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사회적 건강'이란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다른 사회 구성원들과 어울려서 잘 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98년 1월에는 세계보건기구 이사회에서 위에 언급한 건강의 정의에다 '영적(靈的) 건강'을 추가하자는 제안이 논의되기도 하였다. 이후 WHO총회에서 건강에 대한 현재의 정의가 충분히 적절한 기능을 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림으로써 건강에 대한 정의 변경이 무산되기는 하였지만, 영적 건강에 대한 논의도 진행되고 있는 실정이다. 

원불교에 입교하고 나서 비로소 내 나름의 보다 구체적인 '사회적 건강'에 대한 정의를 찾게 됐다. 어느 날 법회 때 교무님이 봉독하던 기도문 중에 귀에 쏙 박히는 구절이 있었다. "어느 곳에 가든지 매양 대중을 이익 주는 동시에 또한 대중의 환영과 보호를 받게 하옵시며…" 이 기도문을 듣는 순간 이것이야말로 그동안 뭔가 아쉬웠던 사회적 건강에 대한 실제적 답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 그대로 어느 곳에서나 나 자신이 대중에게 도움이 되고, 또한 대중들도 나를 환영하고 보호해 준다면 그것보다 더 완벽한 사회적 건강이 또 있을까 싶었다. 

요즘은 이미 자기 혼자 집안에서 잘 챙긴다고 건강한 것이 아니라는 인식이 충분히 확산되어 있다. 각종 동호회나 모임 등이 증가하고 있는 것이 그 반증이다. 그러고 보면 매주 교당을 오가는 일도 건강을 위한 일이 될 수 있다. 어쨌든 교당에 가려면 부지런을 떨어야하니 육체적인 건강은 말할 것도 없고, 좋은 법문을 들으니 정신 건강은 물론이며, 교도들과 즐거운 법담을 나누니 사회적 건강까지 한 번에 해결되는 일인것이다. 

설령 건강의 정의에 영적 건강이 추가되더라도 기도와 선방을 통해 저마다 갊아 있는 영성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니 교당생활이야말로 건강해질 수 있는 조건을 모두 갖춘 완벽한 해결방법이 되는 셈이다. 그 중에서도 집을 벗어나 타인과 교류하는 사회적 건강 측면에서 교당은 매우 유익한 공간이다. 특히 단장과 단원들이 서로 챙기고 늘 단원들을 먼저 생각하는 교화단은 단원들 표정부터 다르다. 즐겁고 활발한 교화단 활동이 건강과 교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길이다.

/강남교당

[2019년 9월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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