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와 문화 차이 극복은 노력과 기다림 필요
그들과 하나 돼야 진정한 불공과 무아봉공 시작

원진희 교도

[원불교신문=원진희 교도] 태양이 팔을 벌리니 그 빛들이 하늘을 안은 것과 같았고, 구름은 꼭 내게로 쏟아질 것만 같았다. 이것이 내가 첫 해외봉사활동을 마친 후 올려다본 캄보디아에서의 감상이었다. 캄보디아는 중세에 크메르 제국이라고 불렸던 만큼, 찬란한 문명을 이룩하고 인도차이나 반도 전체를 호령하던 나라이다. 하지만 중세 말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내부 갈등과 균열, 외세의 침략과 전쟁, 식민지화로 점점 몰락하다 결정적으로 18세기 킬링필드(Killing Fields)를 겪은 깊은 상처를 간직하고 있는 나라이다.

작년 우연한 기회로 접한 세계시민의식을 늘 품고 지내면서, 올 초 졸업을 앞두고 여유가 생긴 1월에 해외봉사를 결심했다. 내가 가진 것을 제공하고 공유할 수 있다면 참으로 가치있겠다고 생각해서였다. 이왕 가는 것이면, 나의 마음과 몸이 담겨있는 원불교 단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그 일념으로 추진을 하니, 결심이 선 후 바로 캄보디아 바탐방교당에 가게 됐다. 이것이 첫 시작이었다. 현재 캄보디아는 국제사회의 움직임으로 많은 변화와 발전을 하고 있지만, 아직도 곳곳에는 오랜 시간에 걸쳐 생긴 아픔들이 자리하고 있다. 그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공생하기 위해 캄보디아의 교당들은 NGO원불교청수나눔실천회와 함께 운영되어지고 있다. 그래서 수도인 프놈펜교당에서는 탁아원을, 제2의 도시인 바탐방교당에서는 무료구제병원, 태권도센터 그리고 한국어학당을 함께 운영하고 있다. 나와 같은 원불교 청소년들이 해외봉사를 계획한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캄보디아 또한 실지불공을 통해 우리의 지향점인 제생의세를 행할 수 있는 산 실터라고 언급하고 싶다.

평일 오전에는 현지 의사 1명과 직원을 도와 병원에 손을 넣어줬다. 현지어가 미숙하기에 약 포장과 정리, 청소를 도왔다. 평일 오후에는 현지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국어 교육을 했다. 필요에 따라 과외형식과 모둠수업으로 진행했다. 달에 적어도 두 번은 전기, 수도 없는 열악한 학교들을 방문해 전공을 살려 요리수업을 진행했다. 충분한 영양을 공급받지 못한 학생들에게 흥미를 주면서 최대한의 영양을 제공해주기 위함이었다. 정기일정 외에는 봉사단체나 개인후원자의 요청으로 식수 공급, 건축, 물품 제공 등을 목적으로 손길이 닿지 않는 학교들을 찾아 다녔다. 

내가 살았던 지역은 충분한 교육과 여가 시설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 적은 수의 운동클럽이나 학원이 있지만 그마저도 대부분의 학생들에게는 매우 비싸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무료로 교육과 터를 제공하는 그곳은 현지인 친구들에게는 만남의 장소이면서 쉼과 배움의 터였다. 그곳에서 그들과 함께 지내며 하나가 될 수 있음에 감사했다.

처음에는 그들과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본의가 서로 다르게 해석되어져 작은 오해나 부딪힘이 있었다. 그러한 일들은 그들과 내가 다를 수 있음을 알게 했고, 그로 인해 나타나는 것이 곧 언어와 문화의 상대성이라 체감했다. 동시에 차이를 이해하려면 피땀 나는 노력과 기다림이 필요함을 알았다. 시간이 흘러 나는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도 정성과 진심에 나를 받아들여줬다. 나는 우리 교화도 다르지 않다 생각한다. 다름을 인지하고 이해하면 마음을 연할 수 있는 길이 마련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들, 나아가 세상과 하나가 돼야 진정한 불공과 무아봉공의 시작이라 생각했다.

대종사는 "그대들도 본래에 익히고 아는 바가 다른 여러 지방 사람이 모인 대중 중에 처하여 먼저 사람마다 특성이 있음을 잘 이해하여야만 동지와 동지 사이에 서로 촉되지 아니하고 널리 포섭하는 덕이 화하게 되리라"고 법문했다. 우리는 사용하는 언어도 겪어온 문화도 생활양식도 다르지만, 마음을 통하면 그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 다름을 이해하고 마음을 통하고자 하면, 비로소 진정한 우리 교법을 전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고 생각한다.

/인천교당

[2019년 9월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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