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방禪房이다.
공부인은 매 순간이 선방이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공부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마음은 알고 있을까?
 

가끔씩 정신이 번쩍 나게 하는 대산종사님의 법문이 있다.
 

“모두 정신 차려서 공부해야 된다.
다 같이 거울을 한번 들여다보자. 
지금 나의 마음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70살이 된 할아버지가 세수를 하고 
깨진 거울에 얼굴을 들여다보기에, 
“무엇이 예뻐서 얼굴을 들여다 보시오.
얼굴만 비춰 보지 말고 마음도 거울에 한번 비춰 보시오” 하였더니,
“어떻게 마음을 봅니까” 하더라.
그 할아버지는 70살이 됐어도 마음을 비춰 보지 않은 것 같더라.
 

우리는 이 마음거울을 비추어 보아
환하고 광명하고 맑은 기운을 가져야
지옥사자가 데려 가려고 왔다가도 그냥 간다.”
 

누구나 마음거울을 소유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불성(佛性)이요, 심불(心佛)이며,
모든 부처님과 성인들이 도장을 찍는 심인(心印)이다.
 

전산종법사는 
“모든 사람들이 생활을 여의지 않고, 지금 처한 그곳에서
부처되는 공부가 무시선(無時禪) 무처선(無處禪)이다”고 설했다.
과거의 수도인들은 일생을 다해 성품자리를 본 후,
그 자리를 잘 보림하기 위해서 선 공부를 말했지만,
그것은 정적(靜的)인 공부이며, 성품을 깨친 사람이나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갓 들어온 보통급도 부처되는 공부를 하도록 밝혀주셨다.
 

전산종법사 이어서 말씀하신다.
“우리가 매일 새벽 좌선을 하며 
자신의 마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왜 중요한가.
겉으로 화려한 것에 취해 
밖으로 드러나는 일들은 대단한 것처럼 생각하고, 
아침에 좌선을 통해 자성을 턱하고 세우는 것은 
별 것 아닌 것처럼 여긴다. 
당장에는 보이지 않으니, 허세와 형식에 끌려가기 마련이다.
 

그러나 공부길을 얻은 사람은 
일 있을 때나, 일 없을 때나 공부길 대로 공들여 간다.
오늘도 공들이고, 내일도 공들이고, 안 돼도 계속 공들이는 것이다.
사람의 육신을 단련하는 것은사람 따라 한계가 있다. 
사람의 힘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공부는 누구나 할 수 있다.
마음은 누구에게나 다 있으며, 각자가 가지고 있는 그 마음에는 
한량없는 삼대력이 구족해 있기 때문이다.
 

한 예를 들어보자.
일상수행의 요법의 ‘심지(心地)는 요란함이 없건마는’ 할 때, 
그 심지는 누구의 심지인가?
지금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고 있는 바로 나의 심지이다.
그 말씀은 ‘ 너는 부처다’하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공부길이다.
 

물론 각자의 업으로 인해 
요란함, 어리석음, 그름이 있어지는 것은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요란함, 어리석음, 그름을 없게 하는 것으로서’ 하면누구나 자성의 정과 혜와 계를 세울 수 있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대종사님의 심지나, 나의 심지나 저 분의 심지나 다 같은 것이다.
 

나도 내 마음을 아무리 찾아봐도 
불성이 보이지 않아 깊은 회의를 품은 적이 있다. 
그러나 오랜 시간 두고 하다 보니까, 
‘아~ 이것이구나’하고 확신이 서졌다.
 

또 한 예를 들어보자.
선을 하다보면, 고요한 자리에 갈 때가 있다.
아주 잠깐이라도 들어간다. 그 맛을 봐야 선을 할 것 아닌가.
그렇다면 잠깐 들어간 그 자리는 누구 마음인가?
바로 내 마음이다. 내 마음에 그 자리가 있는 것이다.
그 고요한 자리가 있는 것이다.
공을 들여 내 마음에 일심을 모으려 노력을 하여 
잡념을 제거하고 또 제거하다 보니 
제거할려고 해도 안됐던 그 잡념이 어느 순간 끊어지면서 
고요가 체험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내 마음이다.
그 마음은 나나 대종사님이 같다. 원적무별한 진경이다.”
 

 지금 다시 묻는다.
“스승님~ 어떻게 이 마음을 봅니까?”
 

지금 이 순간.  자신의 일어나는 마음을 마음거울에 비춰보자.
 

이것이 마음공부의 시작이며, 
우리는 이미 선을 하고 있음이다.
 

사진 정성헌

[2019년 4월26일_마음공부 섹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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