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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의법향] "찰나찰나가 하루가 되고, 하루가 한달되고 일생이 돼"
[선진의법향] "찰나찰나가 하루가 되고, 하루가 한달되고 일생이 돼"
  • 정성헌 기자
  • 승인 2019.10.16
  • 호수 19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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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타원 김제명 원로교무
김제명 원로교무

[원불교신문=정성헌 기자] 원타원 김제명 원로교무(75·圓陀圓 金濟明). 그의 고향은 강원도 강릉이었다. 시골 동네 교회를 열심히 다녔던 그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교회에서는 왜 하느님이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한다고 하는데 누구는 예쁘고 잘 살지만 어떤 애들은 못생기고 가난할까.'

그는 목사에게 물었다. "왜 이렇게 차별이 생겨요?" 목사는 시원한 대답을 못했다. 그냥 하느님 뜻이 그렇다는 말 밖에. 의심이 풀리지 않았던 그는 고등학생이 되던 해부터 교회를 그만 다녔다. 원래 불교 집안이었던 그의 집은 매년 여름철이면 한 번씩 스님 한분을 모셔 법문을 청해왔다. 스님이 오는 일주일 전부터는 집이 한바탕 청소하느라고 들썩였다. 그러나 정작 생식하는 스님께 대접하는 것이라고는 정갈한 정수 한 그릇뿐이었다.

여전히 의심이 풀리지 않았던 그는 스님께 여쭈었다. 그러자 스님은 오히려 질문했다. "학교에서 시험볼 때 공부를 열심히 하면 어떻게 되느냐?" "잘 봅니다." "그러면 해찰하고 덜 노력하면?" "잘못 보죠." 그때야 비로소 스님은 대답을 했다. "그것과 똑같다. 복을 잘 지어놓으면 좋은 부모도 만나고, 부자로 태어난다. 전생이 이생에 나타나는 것이다. 봄에 농사를 잘 지어놓아야 가을에 수확할게 많은 것과 같은 이치란다."

그는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어린 마음에 '목사님은 양복 입은 신사 같아도 무식하고, 스님은 촌스럽고 가난해 보여도 유식하구나'라고 생각했다.
 

무례한 옆집 사람
그가 스무살 되던 해 삼촌이 사는 춘천에 갔다. 한 번씩 가는 삼촌집은 그가 살던 촌동네보다 훨씬 큰 도시였고 볼거리도 많았기에 집으로 돌아가기 싫어졌다. 그래서 우여곡절 끝에 취직한다는 핑계로 삼촌집과 가까운 곳에 어머니 도움으로 집을 마련한다. 강릉에서 올라온 어머니는 소 한 마리가 스스로를 조상이라며 새로 장만한 집을 휘졌고 다니는 꿈을 꾼다. 이상하다 싶었던 어머니는 딸에게 "내가 절에 간 지 오래돼서 그런 꿈을 꿨나보다"하고 딸과 함께 절에 가기로 약속한다.

그런데 옆집 사는 사람이 그 이야기를 어떻게 알았는지 대뜸 찾아와서는 "산에 있는 절보다 시내에 더 좋은 절이 있어요"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자 어머니는 "포교당을 찾는 게 아니라 산 절을 찾아요"라고 대답했다. 옆집 사람은 다시 "포교당 아니고 좋은 절 있어요. 일요일날 모시러 갈께요"라며 가버렸다.

아니나 다를까 정말 일요일에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놀라며 "옆집 사람이 진짜 왔어"라고 어머니께 알렸다. 놀란 어머니도 "저렇게 무례한 사람이 있냐. 아침 일찍부터…"하며 못마땅한 눈치였다. 그러나 이웃이기에 함부로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옆집 사람은 "천천히 준비하세요. 10시에 법회보니까요"하며 마루에 걸터앉았다. 어머니는 내키지 않았지만 사이가 틀어지면 딸이 곤란해질까봐 해결방법은 일단 가보는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간 곳이 춘천교당이었다.
 

강렬한 인상
춘천교당에서 처음 만났던 순타원 김성주 교무는 그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여자분이 설교를 하는데 처음봤지. 놀랬어. 기독교 세련됨과 불교 유식함이 결합됐다고 해야할까." 그로부터 얼마되지 않아 동타원 김의선 교무가 부임했다. 그런데 그는 법회를 볼 때마다 시끄럽고 산만한 분위기가 적응되지 않았다. 일반·청년·학생·유년이 다같이 법회를 보기 때문이었다. 그는 교회에 다녔던 때를 기억해 좋은 생각을 해냈다. "청년 여자애 하나가 노래를 잘해. 그래서 우리 둘이 어린이회를 만들자고 제안했지. 내가 교회다니던 중학교 때 어린이·유년부 선생을 했거든."
 

총부가서 나하고 살자
그러던 어느날 춘천교당에서 대산종사에게 인사 올리러 간다는 소식을 듣는다. 어른들이 가는데 '가야할까 말아야할까' 고민하던 그는 '그래도 모처럼 서울에 가볼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에 따라갔다.

대산종사는 서울 모 병원에 진찰하기 위해 입원한 상태였고, 병원에 도착하니 다른 교당 교도들도 이곳에 와서 인사하고 가는 중이었다. 다음 차례가 된 춘천교당 교도들이 인사를 올리니 대산종사는 교도 한사람 한사람을 살펴보았다. 대산종사는 그를 한참 바라보더니 "니 총부가서 나하고 살자"라고 했다. 못 알아들었던 그는 "네?" 반문을 했고, 대산종사는 "원불교가서 같이 살자고"라고 했다. 그래도 이것이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했던 그는 큰 어른께 다시 물을 수 없어서 얼버무리고 말았다.

"그때 대산종사께서 그러시더라고. '내가 강원도 교화를 위해 기도한지 오래됐다. 강원도에서는 교무가 아직 한사람도 안나왔거든' 하시면서 '네가 강원도 1호가 되면 강원도 금강산·설악산·오대산에서 수행하던 스님들이 줄줄이 따라서 나올 것이다'고." 그는 돌아오는 길에 그 말씀이 '전무출신하라'는 이야기인 것을 교무님이 알려줘서야 알게됐다. 어머니께 말씀드리니 "종교는 그냥 마음 수양하기 위해 다니는거야"하며 단호했다. 그는 '강원도 1호' 이야기가 알 수 없는 의무감이 들긴 했지만,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을 이제 막 졸업했던 이성국 교무가 출가한다며 가고나니 '내가 1호가 아닌가보다'고 생각했다.
 

대산종사 부촉 받들어 강원도 1호 교무로 출가 
"세월 계교하지 말고 일직심 한마음으로 가는게 중요해"

대산종사 말씀 그대로
그러다가 당시 간사생활하던 이성국 교무에게 가끔씩 편지가 왔는데 총부가 너무 좋다며 꼭 한번 놀러오라는 내용이었다. 몇 번의 편지는 결국 그를 총부에 다녀오게 만드는 기연이 됐다. 총부에서 이튿날을 보내고 조실을 찾아가 대산종사에게 인사를 올렸는데 크게 맞아주셨다. "내가 절을 올렸더니 어찌나 반가워하시는지. 이름도 잊지 않으시고 불러주셔서 속으로 얼마나 감탄했는지 몰라." 

또래들이 많았던 총부의 공동생활이 너무 재미있다보니 일주일이 어느새 한달이 되고, 한달을 살다보니 전무출신해야겠다는 생각이 섰다. 그는 그렇게 출가하게 된다. 그런데 묘한 것은 이성국 교무는 당시 간사 근무 2년을 마쳐야 했고, 그는 마침 총부에서 휴양하던 범타원 김지현 교무가 "내가 알아서 후원할테니 내년에 어서 학교에 들어가라"는 말씀에 이듬해 학교에 입학하게 됐다. 대산종사 말씀대로 그가 강원도 1호가 된 것이다.
 

계교하지 말고 정진해라
학교에 입학한 그는 초발심에 너무 신이 났다. '대종사처럼 나도 빨리 대각을 이뤄야지'하고 열심히 살았지만 4학년으로 막상 진급하고 보니 앞길이 깜깜했다. 심각한 고민에 빠진 그는 조실에 대산종사를 만나러 갔다. 당시 법무실장이었던 장산 황직평 종사는 다시 날짜와 시간을 알려주며 이때 오라고 그를 타일렀다.

약속 날짜와 시간에 맞춰 다시 조실을 찾은 그는 법복을 입고 정좌로 앉아있는 대산종사를 보고 깜짝놀랐다. 큰절을 올리고 그는 "3년이나 정진을 했는데 아무 가늠이 없어요. 도인의 근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고 고민을 털어놨다. 그러자 대산종사는 "아~ 너는 3년이나 했냐? 나는 50년 밖에 안했다. 부처님은 5백생을 하셔서 주세불이 되셨는데 나는 5천생 닦기로 했다"고 말씀하자 그는 기가 막혀 "이제는 세월을 계교하지 않겠습니다"고 엎드렸다.

그때 대산종사가 "그래라. 시간은 유한한거야. 계교하지 말고 정진만 하면 된다. 그때부터 쉬지 않으면 된다" 한 말씀은 그의 좌우명이 됐다.
 

원광문화원과 라오펑요
이후 그는 중앙선원, 공익부, 동산선원, 좌포교당, 평화교당, 순천교당, 구로교당, 분당교당에서 근무한다. 원기88년에는 중국교구장과 베이징교당 주임교무로 늦은 나이에 해외발령을 받는다. 그는 어려운 중국교화 환경에서도 '동북아시아 차문화협회'를 만들어 중국 동북 삼성지구 교도들을 배출해내고, 이후 원광문화원을 만들고 중국교구청도 짓는다. 중국 공안들에게 6개월 넘는 시험과 조사에도 종교인으로서 의연하고 현명하게 대응했던 그는 공안들에게 '라오펑요(老朋友·오래된 친구)'라는 존칭어를 듣게 된다. 그는 원기98년 퇴임한 이후 우인훈련원에서 풀 메고 꽃을 가꾸며 기도하는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일직심 한마음으로 가라
그는 후진들에게 들려줄 말로 "항상 생각하는 일인데 제일 중요한 것은 인연이야"라며 "같이살 때 그 인연이 중요한 인연이야. 잘 불공해야 돼"라고 했다. 이어 "수행적공은 공부하는 마음을 놓지 않는 것이 중요해. 의두성리도 '수도인 수첩에 의심거리가 없으면 안된다'는 것처럼 놓지 않고 챙기면 세월이 가서 해결돼"라고 했다.
그는 다시 대산종사를 회상하며 "대산종사께서 '넌 3년이나 했냐? 난 50년 밖에 안했다'는 그 말씀을 잊을 수가 없어. 숨 한번에 생사가 있다고 했듯이 찰나찰나가 하루가 되고, 하루가 한달이 되고 일생이 되잖아. 일직심 한마음으로 가는 것이 소중해"라고 말했다.

[2019년 10월1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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