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산 김정택 종사

[원불교신문=안세명] “정택 의장, 이리 와 내 옆에 같이 앉아. 사진 찍자.” 대산종사는 멀리 제주에서 법을 청하러 온 제산 김정택 종사(濟山 金定宅 75·제주교당)를 언제나 친아들 같이 다숩게 대했다. “그래. 공부 잘하고 있어? 부지런히 정진해야 해.” 할아버지 같이 포근하게 다독여 주는 스승의 지극한 사랑은 그의 가슴에 진리와 법과 회상과 스승에 대한 보은의 서원을 나날이 깊어지게 했다.


바쁘다 보살의 삶
그는 2년 전까지 운영하던 세종의원을 정리하고 자유롭게 생활하고 있다. 그러나 50여 년 쉬지 않고 일했던 의사의 일상이 쉽사리 놓아지지 않는다. 지금도 한센병 환우들을 관리하느라 토요일 오전 진료를 하고 있으며, 요양원이나 경로당에서 진료요청이 오면 마다않고 찾아가 무료진료를 해드리고 있다. 지난 8월 말에는 일주일 간 필리핀 오지에 진료봉사도 다녀온 그다. 

그는 “음식섭식에 지장이 없고 특별히 건강관리라고 할 것이 없다. 지난 번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오래 걷지 못하지만 예회에 빠지지 않고 잘 나가고 있으니 이 하나만으로도 행복하다”며 기도와 선 정진을 이어가고 있음을 전했다. 인문학적 소양이 깊은 그는 문학회(혜향문학회, 현대문학수필작가회) 회장을 두 군데나 맡고, 제주소묵회, 박물관대학, 제주한시회, 4H후원회, 스카우트, 적십자사와 로타리클럽에 나가고 있으니, 그의 별칭이 ‘바쁘다 보살’이다.
 

대산종사의 자비, 총부와의 신맥 깊어
원기63년 초가을이었다. 그의 병원에 유일신 교무가 입원 중이었는데, 회진할 때면 유 교무 머리맡에 놓인 교전이 늘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한번은 흥미를 갖고 빌려서 읽어보니 신선한 감동이 밀려왔다. 그 해 10월 중앙총부에 다녀가라는 유 교무의 당부가 여러 번 있어 안이정 종사의 성리공부 강좌를 수강하고 대산종사를 뵙게 됐다. 많은 분들이 좌정한 가운데 대산종사는 “제주에서 인재가 왔다”며 “정(定)에 깊은 뜻이 있으니 수양을 잘하라”고 ‘정택(定宅)’으로 법명을 내렸다. 

그 후 총부 어르신들이 ‘제주도’ 하면 그를 기억했고, 대산종사는 제주 교무들에게 그의 공부가 잘 진척되고 있는지 물어보고 살폈다. 그렇게 특별한 은혜를 입은 그였기에 대산종사는 그의 마음속에 생불(生佛)로 살아있다. 스승 앞에서는 늘 어린애 같았고, 지금도 어려운 문제가 닥칠 때 스승의 자비성안을 떠올리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답이 생긴다.

그는 원기67년에 제주교당 교도회장, 원기70년에 제주교구교의회의장 등 교구직책을 맡으면서 아내인 김정심(현 제주교구교의회의장) 교도와 함께 궁핍한 교당의 대소사를 해결하려 했다. 할 일 많은 교구 살림을 위해 교구의장으로서 최선을 다했지만 물질적으로 흡족한 도움이 되지 못한 것이 그의 가슴에 늘 안타까움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교단사에 무아봉공하는 한결같은 마음은 총부와 맥을 잇게 했고, 신성이 더욱 깊어지게 했다.


<제주교구 50년사> 가장 보람 돼
그의 가장 큰 보람은 <제주교구 50년사> 발간이다. 교단과 제주교화는 50년의 차이가 있다. 기록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는 그는 다른 사람의 무관심 속에서도 묵묵히 제주교화 반세기의 역사를 정리해갔다. 교구 역사의 길잡이가 이 책 하나에 온전히 담겨지길 서원했다.  당시 교통사고로 병상에 있을 때 이 시기를 천운으로 알고, 한 줄 한 줄 제주의 역사를 써내려갔다. 그것이 800쪽이다. 한센병 구호와 제주지역 평화운동을 인정받아 원기102년 국민훈장모란장을 수상했을 때도 그는 원불교를 빛냈다는 데 큰 의미를 뒀다. 

그가 일생을 통해 원불교 스카우트 발전을 위해 공들인 역사는 자타가 공인한 공심의 산물이다. 원불교 관점에서 보는 스카우트는 건전한 청소년 육성과 지도자의 도덕적 인격수련으로 낙원세계를 지향한다는 목적과 반제교육과 훈련을 통한 교화방법 등이 교화단 조직과 단 활동과 유사하다. 스카우트 운동은 기독교 문화에서 발생된 것이지만 선서의 ‘하느님’은 특정종교를 지칭한 것이 아니며 스카우트의 보편적인 ‘지은보은’의 의무와 타인에 대한 봉사, 자신에 대한 계율이 신앙의 일반적인 목적과 다르지 않다.

그는 황정신행 종사가 원기36년 스카우트 운동을 제주도에서 시작했음을 주목했다. 교단의 노력으로 원기60년 원불교종교장이 공식 등재됐고 그의 권고로 원기69년 제주교당 김덕영 교무가 원불교 성직자로는 최초로 제주스카우트연맹이 주최한 기본훈련을 이수해 이듬해 6월 연장대원 9명으로 제주연맹 산하의 제407단 원불교지역대(동그라미지역대)를 발대했다. 이를 기반으로 전국 곳곳에 지역대 조직의 씨앗이 됐고, 전국대회와 세계잼버리에 참여하면서 김 교무는 세계적 지도자로 성장했다. 이어 원기92년 한국에서는 가톨릭연맹에 이어 두 번째로 원불교스카우트연맹이 설립됐다. 일생을 다해 헌신했던 스카우트 운동이 비록 제주교구에서는 온전히 이어지지 못하고 있지만 청소년교화의 초석을 만들었다는 점에는 그는 자부심을 느낀다. 또한 그는 ‘섬기고 나누고 기르자’는 ‘섬나기 운동’을 원기84년 제언해 제주교구 특색사업으로 채택됐다. 자신과 가정과 교당과 교구에서 신앙을 거룩하게, 봉공을 따뜻하게, 수행을 아름답게 하자는 섬나기 운동은 교화단으로 파급 돼 정착되길 소망했으나 심화단계에 이르지 못해 그의 마음에 아쉬움으로 자리하고 있다.


낙고생활, 동정일여의 삶으로
원불교를 만나 그의 삶에 뿌리 내린 공부길은 어느새 삶의 표준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 하나는 어떠한 고난도 달게 받고 즐거움으로 이겨내라는 ‘낙고생활’이다. 인생을 살아가며 숱한 고비가 있었으나 궂은 일이 업보인 줄 알고 달게 받았고 좋은 일은 늘 과분하게 생각하여 보은하려 애썼다. 내가 짓고 내가 받는 것을 알게 되면 남을 탓하고 원망을 할 수가 없다. 그는 “인과보응의 원리를 아는 한 늘 과(果)에 대한 준비를 하노라”고 자부한다. 또한 그는 학업에 인척의 도움을 받은 바가 많아 자력을 세워 사회적 의무와 책임을 다하고 무자력한 이웃까지도 보호하자는 자력양성을 표준으로 삼고 있다. 가족들에게도 남의 덕을 보거나 의뢰생할을 하지 말고 어떤 어려움도 내 힘으로 헤쳐 나가자는 정신을 갖자고 강조한다. 쉴 틈 없는 의사의 소명을 다하며 ‘동정일여’의 심법은 그에게 여유의 심법을 줬다. 이 일을 할 때는 저 일을 쉬고 저 일을 할 때는 이 일을 쉰다고 생각하고 아무리 겹쳐진 일도 수월하게 넘길 수 있었다. 


교전을 생명 삼아, 연마하고 실천하리
그는 의사라는 직업상 사람들의 죽음을 확인하고 사망진단서를 발부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 그 또한 3년 전 새벽기도를 다녀오다 차에 치여 의식을 잃었을 때 임사경험을 겪었다. 영혼은 육신을 빠져나가 새하얀 빛이 둥그렇게 비치는 터널로 아주 평화롭게 빨려 들어갔으며, 고통도 번민도 생각조차 없는 안락한 세계, 그 장엄하며 눈부시고 맑고 밝은 빛은 대자유를 얻고 허공을 날며 일체에서 벗어나는 느낌이었다. 사람들이 달려오고 길바닥에 팽개쳐진  그를 하얀 포에 덮어 구급차에 옮겼다. 그런 장면을 가까운 공중에서 하염없이 내려다보았다. 그는 죽을 때 떠나는 영혼이 다시 이 세상에 새 몸을 받아 태어나게 된다는 사실을 체험했다.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질문하게 됐으며, 진실한 마음공부의 기회를 줬다. 살아가면서 죽음을 잘 준비한다면 더욱 깊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원불교에서는 40대부터 죽어갈 준비를 하라고 한다. 여생 동안 의술과 영찬(影贊) 작업으로 재능을 사회에 기부하며 남의 장점을 탐색하는 일에 주력하고자 한다. 교전을 생명으로 알고 연마하며, 일원상서원문을 늘 봉독하며, 이 법을 믿은 공덕으로 부처가 된 사람이라는 일화를 남기고 싶다.” 그의 오래된 서원이다.


약력
ㆍ제주교당 교도회장(전)
ㆍ제주교구 교의회의장(전)
ㆍ사회복지법인 섬나기 초대이사장(전)
ㆍ중앙교의회 부의장(전)
ㆍ원기103년 정식출가위 수훈

[2019년 11월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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