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김태우 교도] 그동안 여러 편의 글을 통해 평화에 대한 개념과 역사 그리고 원불교와 관련된 평화에 대해 언급해 왔으며 때로는 원불교 평화운동의 방향성에 대해 종종 설파해 왔었다. 그랬던 것 때문인지 요즘 들어 부쩍 주변에서 평화운동을 실질적으로 어떻게 추진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과 함께 필자가 추진하고 있는 평화사업에 관해 관심을 두고 질문해 주는 사람이 제법 많아졌다. 그러한 이유에서 이번 칼럼에서는 질문들에 대한 답변을 통해 평화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많은 분이 “어떻게 하면 평화를 이룰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 줬다. 이 질문은 항상 제기되는 질문이고 또 그에 대한 답변들도 세간에 많이 거론된 지라 자칫 가볍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데, 사실 이 질문은 평화운동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질문으로 이 질문에 대한 답변에는 답변자의 평화에 관한 철학의 정수가 투영돼 있다. 따라서 이 질문에는 정답은 존재하지 않지만, 다양한 해답들은 존재한다. 그 해답들 가운데 필자는 아인슈타인의 해답을 가장 좋아한다. 그는 “평화는 힘으로 유지될 수 없다. 오직 이해를 통해서만 달성할 수 있다”고 말했다.

평화가 힘이 아닌 이해를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는 이유는 평화가 ‘마음’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유네스코 헌장에 명기되어 있으며, 이에 대한 인용은 여러 차례 해 온 바 있다.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전쟁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생기므로 평화의 방벽을 쌓아야 할 곳도 바로 인간의 마음속이다”라고 기술돼 있다. 이러한 평화의 본성 때문에 평화운동에서 ‘대화’는 이해와 공감을 위한 가장 좋은 방법론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필자는 상기의 질문과 연관된 이야기를 나눌 때 “대화는 평화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이다”라는 말을 즐겨 사용한다. 여기에서 대화가 평화의 종착점이란 의미는 평화를 이루기 위한 진지한 대화가 가능한 상태를 의미한다.

여기까지 설명을 하고 나면 다음의 질문이 어김없이 뒤따르는데, 그것은 바로 “어떻게 하면 진지한 대화를 할 수 있는가?”이다. 진지한 대화가 가능하기 위한 전제조건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신뢰’인데, 그 신뢰 관계가 확고하게 형성되기 위해서는 다양한 노력과 시도들이 필요하다. 특히 마음씀과 마음씨, 다시 말해 마음과 마음 간의 관계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원불교 신앙생활에서 ‘청정한 마음’과 ‘경외심’을 강조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평화를 힘으로 달성하려는 세력들이 압도적인 강력한 힘을 내세우는 것처럼, 평화를 이해로 달성하려는 세력은 그와 반대로 그만한 진실한 마음이 필요하다. 그런데 현실에서 마음에 대한 제대로 된 교육과 훈련이 미흡한 나머지 인류는 아직 평화에 대한 결실은 제대로 맺지 못하고 있다.

불교에서 마음의 구조와 작용에 대해 ‘마음체-마음결-마음씀-마음씨’로 정의하고 있는데, 이는 마음이란 한 사람의 마음에서 다른 사람의 마음으로 서로 그 진의가 전달될 수도 있고 또 그 과정에서 오인돼 왜곡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떤 사람은 ‘커뮤니케이션의 기술’이 중요한 것이 아닌가라고 질의할 수 있지만, 그것은 보조적 수단에 불과할 뿐이다. 왜냐하면 커뮤니케이션 기술이 부족하더라도 공익을 위한 진실한 마음이 함께 한다면 세상은 움직이고, 이러한 사례를 인류 역사에서 무수히 발견된다. 이것이 마음의 힘이며, 평화로 가는 길이다.

/한강교당·원광대학교 국제교류과 초빙교수

[2019년 11월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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