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윤 교무

[원불교신문=최정윤 교무] 어렸을 때 집안 화단에 대추나무 한그루가 있었다. 어머니는 가끔 설거지를 마치고 생선 가시를 접시에 가득 담아 나무뿌리 가까이에 땅을 파고 묻어주곤 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가을이 되면 커다란 대추가 주렁주렁 열렸는데 그 많은 대추의 당도가 다 달랐다. 왜 이 대추들은 한 나무에서 어머니의 사랑을 똑같이 받고 자랐는데 맛이 이처럼 다를까 의아하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어느 날 소태산 대종사는 제자들에게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해서 복 짓고 받는 내역을 설명해 줬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같은 분량의 복을 짓고도 그 과를 받는 데에는 각각 차등이 있기 마련인데 이것은 물질의 분량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을 짓는 사람 마음의 깊고 얕음에 따라 상대처의 능력 여하에 따라 다르다고 한다. 

과거 영광에서 농부 한 사람이 어느 해 여름 장마에 관리 세 사람의 내를 건네준 일로 인해 그들과 서로 알고 지내게 됐는데, 그 농부는 한날한시에 똑같은 수고를 들여 세 사람을 건네줬건마는 후일에 세 사람이 그 농부의 공을 갚는 데에는 자기의 권리와 능력의 정도에 따라 각각 차등이 있었다고 자세히 설명한다.

이처럼 아무리 작고 적은 복이라 하더라도 그 짓고 받는 원리는 다 같은 것이다. 결국 한 사람이 동일한 복을 동일한 양만큼 동일하게 지었다 하더라도 그 복을 받는 상대의 권리와 능력의 정도에 따라 그 복 받는 바 내용이 달라질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영원한 세상에 길이 오래오래 복을 잘 짓고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될까?

정산종사는 사람들에게 복을 지으면서 알아주지 않는다고 한탄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그 이유는 우리가 복을 짓고 칭찬을 받아 버리면 그 복의 반을 받아 버리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복을 지음이 부족함을 생각할지언정 당장에 복 받지 못함을 한탄하지도 말고 오직 오는 복을 아껴서 길이 복 받는 생활을 하도록 공부해야 한다.

어느 날 이공주가 복 짓고 받는 이치에 대한 감상을 말한다. “대종사님 제가 저번에 이웃집 가난한 사람에게 약간의 보시를 하였는데 그가 그 후로는 저의 집 일에 몸을 아끼지 아니하오니 복은 지을 것이옵고 지으면 받는 것이 이와같이 역력함을 알았나이다”고 하자 대종사는 다시 공주에게 질문한다. “그대가 복을 지으면 받아지는 이치는 알았으나 잘못하면 그 복이 죄로 화하는 이치를 아느냐?”고 묻자 공주는 “복이 어찌 죄로 화하겠습니까?”라고 반문한다.

이에 대종사는 지어놓은 그 복이 죄가 되는 것이 아니라 복을 지은 그 마음이 죄를 짓는 마음으로 변하기도 함을 경계한다. 그러므로 우리 공부인은 천지의 응용 무념한 도를 체 받아 보은행을 하도록 생활 속에서 상 없는 덕과 변함없는 복을 짓기에 힘써 노력해야 한다.

[2019년 12월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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