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시물굴 내부. 당시 선흘리 주민이 굴속에서 은신할 때 쓰던 그릇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원불교신문=박경희 사무국장] 3년 전 여름, 제주. 바람이 불때마다 빛으로 일렁이는 숲 속에 우리는 서 있었다. 누가 일러주지 않으면 눈길조차 주지 않을 좁은 입구를 바라보며 대화가 끊기고 인솔자가 나눠준 장갑을 양손에 낀 후 모두 쪼그려 앉아 몸을 웅크렸다. 손전등을 들고 있던 앞 사람이 능숙한 몸짓으로 어두운 입구를 향해 배를 바닥에 댄 자세로 기어가기 시작했고 줄줄이 뒤를 따랐다. 드디어 내 차례. 얇은 면 티 아래로 차디찬 돌바닥이 느껴지고, 밝음이 사라진 공간 속으로 머리가 들어간 순간부터 두 손은 발이 되어 몸을 일으킬 수 있는 곳까지 네 발로 기었다. 한 2분 정도 지났을까? 축축하고 서늘한 기운이 전신을 감싸고 낯선 어둠이 공포로 바뀌려는 순간, 두 눈이 크게 떠지며 탄성이 나왔다. 이렇게 넓은 공간이 숨어있었다니.

휴대폰 불빛으로 밝힌 동굴 내부는 두발로 설 수 있는 것은 물론, 옆으로 길쭉하게 평평했으며 백여 명 이상이 모여 있어도 답답하지 않을 만큼 큼직했다. 발 아래로 가느다란 물줄기가 흘렀고, 머리 위 천장엔 박쥐들이 대롱대롱 매달려있었다. 

잠시 숨을 고른 우리는 낮게 솟은 바위를 골라 앉아, 이 안에 서린 한을 위로하고자 만든 노래를 청해 들으며, 각자 다른 방식으로 넋을 애도하는 의식을 치렀다. 그리고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오려 발걸음을 재촉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익숙해지기는커녕 숨쉬기가 불편해지고 동굴을 둘러싼 벽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는 등골을 오싹하게 했기 때문이다. 햇살 아래 모인 우리는 크게 심호흡을 여러 차례 했다. 살 것 같았다. 잠시 머문 것 뿐 인데도 우리는 갑갑했던 좀 전의 경험에 몸서리치며 감상을 주고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만큼 강렬했고 인상적이었기에. 절대 지워지지 않을 마음속 사진으로 남은 그 곳은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 산26번지에 위치한 ‘목시물굴’이다. 

1948년 11월 21일 선흘리 일대가 초토화되고 이를 피해 선흘리 주민들은 이 굴 안에서 은신했다가, 11월 26일 위치가 발각되어 수십여 명이 희생당했다. 마을과 굴 안에 있던 주민들을 사라지게 한 이들은 누구인가?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깊은 슬픔과 고통을 안겨준 이들은 누구인가?


5.18 민주화운동 40주기
5월의 봄 밤, 광주. 불빛 하나 없는 어둠이 도시를 감싸고, 들리는 소리 하나 없는 적막함 속, 침을 넘기는 소리조차 귓가를 자극하는 극도로 예민한 상태에서 총을 움켜쥔 손바닥에 힘을 그러모은다. 숨을 쉴 때마다 지난 며칠 동안 거리 곳곳에 널브러져 있던 사람들의 형체와 얼굴이 떠올랐다 가라앉는다. 여기 모인 우리들은 알고 있다. 날이 밝으면 우리도 어둠과 함께 사라질 거라는 걸. 그럼에도 떠나지 않고 이곳을 지키고 있다. 매 순간 솟구치는 두려움과 억울함을 한층 높게 치솟는 뜨거운 무언가가 내리 누르고 있기 때문이다. 너무 뜨거워서 제어가 되지 않는 그 에너지를 말로 설명할 수 없다. 설명할 수 없어서 택한 길이기도 하다. 시간은 무심히 흘러가고 도시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잠들지 못하고 있다. 새벽 4시경, 적막을 깨고 교전이 벌어진다. 힘없이 무너지는 몸들이 몹시 가벼워보인다. 먼저 간 친구, 가족, 동료 곁으로 가기에 무리가 없을 만큼.

1980년 5월 27일, 광주시 동구 광산동에 위치한 전남도청엔 버틸 수 없음을 알고도 버틴 시민군들이 있었다. 얼마나 많은 시민군이 있었는지,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었는지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1980년 5월 광주는 고립된 섬이었고, 서로를 챙겨주며 돌봤던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에게 총부리를 겨눈 이들은 누구인가? 사무치는 원통함과 울분을 심어준 이들은 누구인가?
 

세월호 참사 6주기
6년 전 4월의 밤, 인천. 나는 수백 명의 사람과 많은 화물을 싣고 제주를 향해 출발했다. 속을 알 수 없는 바다의 물살이 심술부리지 않길 바라며, 집중력을 흐트러뜨리지 않는 데에 최선을 다하기로 다짐하면서. 늘 하는 일인데도 매번 기분이 다르다. 오늘은 수학여행 가는 학생들을 태워서인지 그들의 들뜬 마음만큼 물살을 가르는 움직임이 경쾌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너른 바다를 헤쳐 가는 나의 유일한 동행은 파도를 깨우는 바람뿐이다. 이제 곧 해가 떠올라 모두를 깨우겠지. 바다위에서 맞이하는 아침은 눈부시게 아름답다. 쿵! 내 몸에 이상이 생긴 모양이다. 중심이 잡히지 않는다. 왼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다. 아직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했는데, 나만 믿고 내게 몸을 의탁한 사람들은 어떡하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최대한 천천히 가라앉는 것뿐인데. 내가 말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모두 피하라고, 밖으로 나오라고 외칠 수 있다면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제발 움직이라고.

2014년 4월 16일 전남 진도군 병풍도 앞 인근, 오전8시 49분부터 시작된 침몰로 세월호에 타고 있던 승객 476명 가운데 299명이 사망하고 5명이 실종됐다. 가만히 있으라는 목소리를 따르지 않은 172명은 생존했다. 눈앞에 있는 사람들을 구하지 않은 이들은 누구인가? 충분히 살릴 수 있었던 시간을 낭비한 이들은 누구인가? 
 

1948년 11월 26일 제주 조천읍 선흘리 일대가 초토화 되고 주민들이 이 굴안에서 은신하다 희생당했다.

기억하고 행동해야
올해 우리는 제주4.3 72주기, 5.18민주화운동 40주기, 세월호 참사 6주기를 마주한다. 우리는 잘 모른다. 시간이 흘러도 옅어지지 않는 기억과 아픔이 있다는 것을.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짙어지는 그리움과 커지는 애달픔도 있다는 것을. 거대한 국가를 상대로 길고 긴 싸움 끝에 쟁취한 사과와 이름을 얻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수고가 있었는지를. 누가 발포명령을 내렸는지를. 왜 구하지 않았는지를. 수십 년이 지났지만 규명되어야 할 진실이 아직 많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우리가 현재 누리고 있는 자유로운 일상과 평화롭고 민주적인 사회가 결코 쉽게 얻어진 게 아님을. 지나온 발전 과정 속에 우리 역시 최선을 다해 힘을 보탰음을. 방심하면 힘들게 쌓은 소중한 가치가 와르르 무너지기도 한다는 것을. 그러므로 우리는 기억해야만 한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옳지 않은 일을 하려는 것을 막기 위해서. 또 우리는 행동해야 한다. 

원불교 제주교구는 매년 교당별로 제주4·3희생자 천도재를 올려왔고, 원기94년부터 매년 3월 마지막 일요일 4·3평화공원위령제단에서 천도재를 진행하고 있다. 평화의친구들도 지난 2018년부터 원불교 인권위원회·원불교평화행동과 공동으로, 여전히 침묵 속에 고통 받고 있는 유가족과 제주도민들을 위로하고 영령을 추도하는 ‘원불교 제주4·3을 걷다’를 기획해 3월 말에 진행하고 있다. 올해는 코로나19로 인해 시행하지 못했지만, 지속적으로 이어갈 예정이다. 이후에는 제주도뿐만 아니라 광주·거창·여수 등 국가폭력으로 피해를 입은 현장에도 찾아가려한다. 이 땅에 그리고 우리 안에 진정한 평화가 깃들길 염원하기에.

/(사)평화의친구들 사무국장 

[2020년 4월 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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