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타원 하대연 원로교무

[원불교신문=류현진 기자] 40여 년의 해외 생활을 마치고 지난해 11월 완전히 한국으로 돌아온 익타원 하대연 원로교무(88·益陀圓 河大淵). 그는 대산종사의 뜻을 받들어 하와이 교화의 터를 닦은 장본인이다. 현재 미국 시민권 보유자로 한국으로의 귀화 신청을 하기 위해 준비 중인 그를 만났다. 


어린이들이 좋아
하 원로교무는 경주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의 할아버지는 경주 외곽에 절을 불사할 정도로 불심이 강했다. 비교적 부유했던 그의 집은 경주 중심가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때는 절이 멀리 산에 있었어. 오빠랑 언니는 할아버지를 따라 절에 다녔는데 난 절까지 가기는 힘들어서 동생들이랑 집 앞에 있는 교회를 다녔어.” 그 당시 경주 시내에는 교회가 많았고, 유치원 운영을 병행하는 곳이 많았다. 어린이들을 좋아하는 하 원로교무는 교회에 다니며 아이들을 지도하는 유치원 교사의 존재를 알게 됐고, 훗날 그의 직업으로 이어지게 된다. 6.25 전쟁 발발 후 가족들과 부산으로 피난을 떠난 그는 동래 온천장 근처에서 살고 있었고, 마침 집 근처에는 개신교에서 운영하는 보육원이 있었다. “그 당시 피난을 많이 와서 보육원에서 아이들을 볼 사람이 더 필요하다고 했어. 원래 아이들을 좋아해서 보육원에 가서 일을 돕게 됐지. 나중에 보육대학이 생겨서 전문적으로 배워 보육교사 자격증을 취득했어. 소질이 있었던 것 같아.” 그는 보육원 안에 있는 개신교 유치원에 취업해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다. 나중에 보니 그 당시 근처에 원불교에서 운영하는 한국보육원도 있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아직 그는 원불교에 대해 모르던 때였다.


수녀가 되고 싶었던 소녀
하 원로교무가 원불교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그의 남동생이 수타원 최종업 종사(가락교당)의 딸과 결혼을 하게 되면서였다. 원기92년 열반한 수타원 종사는 서울보은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성지수호사업과 해외개척불사에 크게 기여했다. “그 어른 집에 방문했는데 벽에 일원상이 붙어 있어서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원불교 신앙의 대상이라고 했어.” 남동생이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공부하게 되면서 부산에 있던 가족들이 모두 서울로 올라오게 됐다.  

하 원로교무는 어려서부터 수녀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유년회부터 교회를 다니긴 했지만 중학교 시절 경주 시내에서 본 수녀의 모습은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단정한 수녀복을 입은 맑고 깨끗한 수녀의 이미지가 좋아 보였다. “가톨릭 수녀들을 보고 너무 부러워서 수녀를 하려고 했어. 까만 옷을 입은 그 모습이 너무 좋았어. 나도 시집 안 가고 수녀해야지라고 생각했어.” 실제로 그는 부산에서 직장생활을 하며 수녀가 되고 싶은 마음에 성당을 찾아가기도 했다. 수녀가 되려면 일요일마다 성당에 나와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고 해서 성당을 다녔던 터였다.

“사돈 덕분에 원불교를 알게 돼서, 원불교에도 수녀가 있냐고 물었어. 그런데 원불교에는 교무가 있다는 거야. 누구든지 받아주냐고 했더니 받아준다고 해서 뛸 듯이 기뻤지. 그 대신 먼저 입교를 하라고 해서 당시 사돈이 다니고 있던 서울교당에 가서 입교를 했어.” 당시 그의 집은 원남교당 근처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래서 집에서 가까운 원남교당으로 법회 출석을 하게 됐다. “승타원 송영봉 교무님이 주임으로, 초타원 백상원 교무가 부교무로 있었어. 가자마자 교무가 되고 싶다고 했더니, 먼저 법회도 잘 보고 원불교에 잘 다녀야 한다고 해서 그렇게 했어.” 
마침 동산선원 원장으로 있던 공타원 조전권 선진이 원남교당에 강의를 하러 오게 됐다. “원장님께 인사드리고 나도 동산선원에 가서 공부하고 싶다고 간청했더니, 와보라고 하셨어.” 그렇게 그는 교당에 다닌 지 1년도 되지 않아 교무가 되기 위해 동산선원으로 들어가게 된다.


장산도에서 꽃피운 교화
중앙총부 옆에 있는 이리보육원이 그 당시만 해도 동산선원 가까이에 자리하고 있었다. 보육교사 자격증이 있었던 하 원로교무는 동산선원에서 공부하며 이리보육원에 가서 아이들을 지도했다. 이리보육원으로 정식 발령을 받고 일하던 중 복막염 수술을 해야 해서 잠시 쉬고 있던 참에, 동산선원 선생으로 있었던 오희원 교무가 목포교당에 발령을 받아 가게 됐다는 소식을 듣고 요양차 함께 목포로 떠나게 된다. 당시 목포교당에는 장산도에서 배를 타고 목포로 법회를 보러 다니는 교도들이 있었다. 교도들이 오 교무에게 장산도에도 교당을 내줄 것을 요청했지만 보낼 교무가 없어 고민하던 차에 하 원로교무가 “제가 장산도로 가겠다”라며 자진하고 나섰다. 

유아교육을 전공했던 그는 유치원(현 원광어린이집)을 시작했다. 정읍에 유치원이 처음 생기고, 두 번째로 생긴 교단의 유치원이었다. 정읍은 전공한 재가교도가 원장을 하고 있었기에 교무로서는 처음으로 유아교육을 전공해 유치원을 열게 된 것이다. 당시 장산도에는 유치원이 하나도 없었기에 유아들이 100명도 넘게 몰려 성황을 이뤘다. 학부모들이 교사, 교장까지 있었기에 기회를 얻어 초등학교 체육대회 때 30분간 찬조출연 공연으로 원불교를 알리는 데도 힘썼다. 유아들 덕에 부모들까지 법회에 나오게 돼 장산교당은 교화에 꽃을 피우게 됐다. 하 원로교무 혼자서 일반법회, 청년법회, 학생법회, 어린이법회를 보며 바쁜 나날을 보냈지만 하나도 힘들지 않고 마음에는 기쁨이 가득했다. 
 

대산종사 뜻을 받들어 하와이로
그러던 어느 날 총부에 일이 있어 들렀는데 대산종사는 그에게 미국에 가라는 명을 내렸다. 당시 교무들이 미국에 나가는 것이 쉽지 않았는데 마침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남동생이 미국에서 유학생활 중이었기에, 하 원로교무는 형제초청으로 미국에 쉽게 들어갈 수 있었다. 처음에는 뉴욕교당으로 발령을 받아서 갔다. 인연이 있었던 송영봉 교무와 백상원 교무가 뉴욕에 있었기에 영어를 못해도 크게 상관이 없었다. “미국에 있는데 내가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 같아서 2년 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어. 그랬더니 대산종사께서 이번에는 하와이로 가라는 거야. 뉴욕에는 교무님들이 있었는데 영어 한 마디 못하는데 혼자서 하와이에서 어떻게 하나 걱정이됐지.” 

다행히 당시 하와이에는 일본인들이 많이 있었고, 초등학교 5학년 때 해방이 돼 일본말을 할 수 있었던 하 원로교무는 영어 대신 일본어로 소통하며 근근이 생활할 수 있었다. 미주 교령이었던 상산 박장식 종사가 하와이에 들러 하와이교당 봉불을 도와줬다. 집은 샀지만 유지할 돈이 하나도 없었다. 그는 교당 근처에 혼다에서 운영하는 일본 골프장 구내매점에서 일을 하며 교당을 유지해 갔다. 월요일에서 토요일 오전까지 매점에서 일하고 토요일 오후에는 법회를 준비했다. 무료로 영어를 가르쳐 주는 교회에 가서 틈틈이 영어도 익혀 하와이대학 입학 자격도 얻었지만 교당운영으로 공부를 할 여건은 되지 못했다. 어려운 생활 중에도 그는 원불교 교당이 생겼다고 신문에 광고도 내는 등 적극적으로 교도들을 모았다. 하 원로교무는 마침 만타원 김명환 정사가 하와이를 방문했을 때, 하와이국제훈련원 불사를 권선하고 함께 부지를 찾아 하와이국제훈련원 봉불에도 큰 기여를 했다. 하와이국제훈련원에서 임기를 마친 그는 퇴임 후에도 훈련원에서 정양하며 교화를 보조하다 지난해에서야 긴 해외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다음 생에도 전무출신
한창 교화를 꽃피울 무렵, 영어 한마디 하지 못하는데 해외로 나가게 된 그. 마음에 원망심은 없었을까 싶어 질문했다. 하지만 그는 손사레를 쳤다. “다 내가 좋아서 했던 일이야. 마음에 원망심이 든 적은 한번도 없어. 모든 순간이 즐거웠어. 다음 생에도 그 다음 생에도 나는 세세생생 전무출신으로 살아갈 거야.”

[2020년 4월 1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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