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 소장

[원불교신문=정창현 소장] 2012년 김정은 체제가 출범한 후 북한여성 사이에서 단연 화제의 인물은 ‘영부인’ 리설주였다. 그는 2012년 7월 6일 모란봉악단의 시범공연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북한에서 영부인이 공식 석상에 등장한 것은 40년 만이었다. 일주일 뒤 그는 노란색 물방울무늬 원피스와 하얀색 카디건 차림에 하이힐을 신고 김정은 위원장의 현지 시찰에 동행했다. 25일에는 릉라인민유원지 준공식에 부부가 팔짱을 낀 모습이 언론매체에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9월 1일 김 위원장의 공장 시찰에 동행했을 때는 바지 입은 모습이 공개됐다. 

다른 나라에서는 자연스러운 행보와 차림이었지만 북한 사회에서는 그야말로 파격이었다. 여성이 공개석상에서 팔짱을 끼고, 바지를 입는 모습은 금기시됐기 때문이었다. 특히 가부장적 인식이 강한 북한의 중장년층에게는 굉장히 낯선 행보였다. 그후 리설주 여사는 2018년 김 위원장의 정상외교에도 동행했다. 


일찍 남녀평등의 조건은 갖췄지만
이러한 행보에 북한의 신세대 여성들은 환호성을 보냈다. 더 이상 팔짱을 끼거나 바지를 입는 것에 대해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었다. 일부에서는 김 위원장의 스위스 유학 경험, 리설주 여사의 남한, 중국, 유럽 경험 등 개인적 성향이 반영된 것이라고 분석 했다.  그러나 북한 최고지도자 부부의 파격행보는 단순히 유럽에서 유학했거나 여행한 개인적 경험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 정치적으로 ‘의도된 연출’이었고, 그 뒤에는 북한 여성의 지위 향상과 인식 변화가 깔려 있었다. 

북한은 1946년 7월 남녀평등법령을 제정, 공표했다. 남한보다도 훨씬 이른 시기에 제도적으로 차별이 금지되고 남녀평등이 이뤄진 셈이다. 문제는 의식개혁 없이 실질적인 남녀평등이 법령 발표 하나로 단번에 될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남녀평등법으로 “여성들 모두가 국가와 사회의 당당한 주인이라는 긍지와 자부심”을 얻고, 남한의 국회의원에 해당하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도 여성 비율이 20%이상 차지하게 됐지만 여전히 집안일은 전적으로 여성 몫이었다. 여성은 ‘사회와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나라의 꽃’인 동시에 아내와 어머니로서 가정을 돌보고 출산과 양육까지 도맡아 하는 삼중의 역할을 맡아왔다. 국가적으로는 여성의 가사 부담을 줄이기 위해 전국적으로, 직장별로 탁아소와 유치원을 갖추고, ‘밥공장’을 만들었지만 여전히 사회적으로 남성 우월주의와 가부장적 인식이 팽배했고, 퇴근 후 세대주(남편)들은 가정에서 아무런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존재였다. 사실 가장의 월급에 전적으로 의존하던 시절 남한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가정의 경제주체로 부상한 여성
이러한 상황은 1990년대 최악의 경제난(‘고난의 행군’)이 닥치면서 변화하기 시작했다. 전적으로 국가에 의존하던 공급체계가 붕괴 되면서 가정생활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여전히 ‘직장세대’(맞벌이) 비율은 줄지 않았지만 남편의 직장수입으론 가계를 꾸러갈 수 없게 됐다. 이렇게 되자 직장을 떠나기 어려운 남성을 대신해 여성들이 시장에 나가 장사를 하거나 외국과의 무역에 뛰어들었다. 경제난 타개를 위해 북한 당국도 여성의 경제 활동을 암묵적으로 허용했다. 그 결과 ‘시장 활동’을 통해 남편의 월급보다 수십, 수백 배 많은 고수익을 올리는 부인이 엄청나게 늘었다. 시장이나 무역을 통해 신흥부유층으로 등장한 이른바 ‘돈주’의 80% 이상이 여성이라는 추정도 나왔다. 

여성들이 시장 활동을 통해 경제적 자립을 이루고 고수익을 올리면서 과거와 달리 소비문화를 주도하는 층으로도 부상했다. 김정은 위원장이 직접 화장품의 품질을 ‘세계적 수준’으로 높이라고 지시하고, 각종 여성 편의시설을 건설하는 것도 이 같은 현상과 연결돼 있다. 비단 화장품만이 아니라 옷과 가방, 구두 등 여성을 겨냥한 상품들이 북한의 백화점이나 상점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됐다. 자연스럽게 경제권을 쥔 여성들의 가정 내 발언권도 높아지게 됐다. 어느 정도 일반적인 현상인지 모르겠지만 돈 못 벌어오는 남편을 ‘멍멍이(집 지키는 개라는 뜻)’, ‘병풍(아무 소용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다는 뜻)’, ‘낮 전등(필요 없는 존재라는 뜻)’ 등으로 폄하하는 말들이 돌기 시작했다. 
 

3월 8일 부녀절을 맞아 아이와 함께 꽃 상점에 온 남편이 아내에게 줄 꽃을 사고 있다.


김정은 시대 여성의 지위 향상 뚜렷
북한 당국도 2000년대 초부터 남성이 가정의 일원으로서 가사분담에 적극 나서야 한다는 점을 교양하고 나섰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2002년 조선중앙TV로 방영된 드라마 <엄마를 깨우지 말아>다. 이 드라마는 유치원 다니는 딸을 둔 여성 과학자인 엄마와 건설전문가 남편이 맞벌이를 하면서 겪는 육아와 가사분담을 둘러싼 갈등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남성의 인식전환을 촉구하고 있다. 이 드라마에서 아내는 남편에게 “어떻게 남자들만이 사회적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난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어요”라고 강하게 항의한다. 

부부간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등장한 시어머니가 아들(남편)에게 “세상이 변해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 밥을 하고 빨래를 하는 게 흉이 아닌 시대가 됐다. 이제 네가 안해(아내)의 일을 더 도와주어야 한다”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이 드라마가 무엇을 지향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 드라마는 늦게 들어오는 아내를 위해 유치원에서 딸을 데리고 온 남편이 저녁상을 차리고, 그 동안에 잠깐 잠이든 엄마를 깨우려는 딸에게 ‘엄마를 깨우지 말아’라고 하면서 끝을 맺는다. 

여성의 발언권이 높아지면서 과거 그냥 참고 지나갔던 남편의 폭력이나 부조리에 대한 비판의식도 높아졌다. 2001년 방영된 10부작 드라마 <가정>은 북한 최초로 금기시 됐던 부부간의 불륜과 갈등을 정면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이 드라마는 북한 인민들에게도 상당한 충격을 준 작품으로 이혼재판으로까지 치달은 부부간의 문제에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9부에서 끝맺었다. 실제로 평양에서는 여성의 제기로 이혼하는 사례가 크게 늘었다고 한다. 

김정은시대에 들어와 부각된 ‘리설주 현상’은 이러한 북한의 세태를 반영하고, 세계적 추세에 따라가려는 흐름과 연결돼 있다. 북한은 ‘어머니의 날’도 새로 지정하고, 최근에는 3월 8일 국제부녀절을 과거보다 더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이날 세대주는 아침상을 차리고 아내에게 꽃을 선물하는 날이다.  

썩살 배긴 손이라 / 등 뒤에 감추지 말고/ 꽃다발을 받아다오 안해여/ 늘 입고 다니던 수수한 작업복 /오늘만은 잠시 벽에 걸어두시라/ 햇볕에 타고 거칠어진 얼굴을 / 이 꽃다발에 한껏 묻으시라 (심영일, <꽃다발을 받아다오> 조선문학 2015년 3호)

아내에게 꽃다발을 선물하고, 아내 대신 남편이 아침밥을 짓는 모습은 2000년대에 대도시를 중심으로 등장한 신풍속도다. 어떻게 보면 ‘꽃’과 ‘밥’은 앞으로도 계속 수고를 부탁한다는 일회성 행사가 될 수도 있지만, 아내의 고생에 대해 사랑과 감사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위안의 성격도 있다. 남성들이 선호하는 여성상도 바뀌어 과거 얌전하고 집안일 잘하는 여성을 최고로 쳤다면 최근엔 주도적이고 당당한 여성들이 인기가 많다고 한다.

북한 드라마 대사 중에 “사랑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하는 것”이란 말이 나온다. 도전적이고 진취적인 북한의 신여성들이 북한사회 변화의 한 축을 맡아 ‘말’이 아닌 ‘실천’을 이끌어낼 수 있을지 주목할 대목이다. 물론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다만 ‘리설주 여사’에 이어 김정은 위원장의 여동생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까지 정치 정면에 나서면서 북한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역할은 더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ㆍ현 평화경제연구소장
ㆍ서울대 국사학과, 동 대학원 졸업
ㆍ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 전문기자
ㆍ북한대학원대학교와 국민대 겸임교수
ㆍ(사)현대사연구소 소장 역임
ㆍ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 정책기획위원 
ㆍ민화협 정책위원 등으로 활동

[2020년 4월 1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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