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희 사무국장

[원불교신문=정선희 사무국장] 하루도 똑같지 않은 세상을 요즘처럼 실감하고 사는 나날이 있었나. 어제의 도덕이 오늘도 맞는지 헷갈리고, 오늘의 진실이 내일도 유효할지 확신할 수 없는 시절이다. 우리가 아직도 한참을 더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서구 선진국들의 ‘선진성’이 20세기 중후반에 머물러 있는, 역동성이 한참 결여된 구닥다리임을 깨달으며 소위 국뽕이란 것에 취해있다가도, 수십만의 나와 함께 살아가는 누군가가 아동과 여성의 성착취동영상 범죄의 공범자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허상의 타력신앙에 빠져 ‘진리적 신앙과 사실적 도덕의 훈련’과는 정반대의 생활을 종교의 이름으로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온탕과 냉탕을 번갈아 오가듯 정신이 없다.

이 모든 것에 그저 놀라며 남들처럼 호들갑을 떨기에는 ‘대종사의 제자’라는 이름값이 아깝다. 왜냐면 후천개벽이 어떻게 우리를 찾아오고 어떻게 진행될지, 그래서 어떤 준비를 해야하는지 대종사는 100년 전에 이미 다 알려주지 않았던가. 그 교리를 100년간 받들어 공부한 우리가 아이처럼 놀라기만 한다면, 그게 놀랄 일이다. 

하지만 우리 인류가 전무후무 겪어보지 못한 이 ‘후천개벽’의 거대한 스케일을 피부에 와 닿게 가늠하는 것은 아무리 대종사의 제자라고 해도 결코 쉽지 않다. 아니, 실은 알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늠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넘어서는 변화이기 때문에, 바로 ‘후천개벽적’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발을 끝까지 세우고, 고개를 쭉 빼서 저 앞을 바라보려 할 때, 우리 시야에 보이는 것까지는 그저 여전히 선천적일 확률이 높다. 아직 보이지 않는, 알 수 없는, 지평선과 수평선 너머 저 어디쯤에 후천개벽 세상에 있는데, 그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의 설명에는 성자의 말씀도 있지만 사기꾼의 거짓도 있으니 현실은 혼란 속이다. 

이 혼란의 와중에 원불교 교도로서 우리의 기쁨은 ‘후천개벽’이 무엇인지 판단할 수 있는, 주세성자 대종사가 전한 기준이 있다는 것이다.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 즉, 후천세상은 물질문명이 발전된 만큼 정신문명이 발전된 세상이며, 이러한 양쪽의 균형으로 ‘낙원’을 누리는 것이 후천개벽의 내용이라고 밝힌 것이다. 이 얼마나 쉽고 명확한가. 물질문명의 발전에 대한 알아차림은 굳이 유념하지 않아도 저절로 되는데, 정신문명의 발전과 정신·물질의 균형에 대한 알아차림은 끝없는 유념을 요구한다.

또한 ‘후천개벽’이 천지의 기운이고 우주의 흐름인데도 모든 물체는 처음의 운동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려는 관성이 있어서, 우리는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이러한 변화에 저항할 수밖에 없다. 특히 혼란한 시기에는 나와 내가 속한 집단을 지키기 위해 보수적인 경향성의 취사를 방어적으로 반복하고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진취성을 포기하게 되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올해 25주년을 맞이하는 원불교여성회는 ‘변화하는 여성, 변화시키는 여성’이라는 구호로 후천개벽의 주인공이 되자고 다짐해왔다. 변화를 하는 것도, 변화를 시키는 것도, 그 얼마나 뼈를 깎는 고통과 태산을 옮기는 인내와 맹수를 길들이는 힘이 필요한 과정인가! 그러나 결코 피해갈 수 없는 인류 진화의 중대한 시기를 맞아, 우리 원불교 교도는 모두 후천개벽적 변화에 대해 더욱 섬세한 알아차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종사가 무려 100년 전부터 준비시킨 이 일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이 시기는 쉽고 안전한 길이 틀린 길이다. 부디 우리 교단이 ‘변화하는 원불교, 변화시키는 원불교’가 되어 선후천의 경계선에서 길잃은 인류를 위한 본연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게 되길 기원한다. 

/원불교여성회·(사)한울안운동

[2020년 4월 1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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