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타원 고원선 원로교무

[원불교신문=류현진 기자] 영산선원, 마산교당, 중앙중도훈련원, 정토회교당, 서울교당, 교정원, 영광교구장, 중앙교구장, 전북교구장, 교학대서원관 교감. 출가 후 퇴임까지 열 군데에서 살고 가면 좋겠다는 그의 바람이 그대로 이뤄졌다. 왕타원 고원선 원로교무(74·汪陀圓 高圓善). 19살에 출가해 50여 년을 교화 현장에서 힘쓰며 교정원 교화부원장과 교육부장, 수위단원, 여자정화단총단장, 교구장 등을 두루 역임하고, 현재는 원로회의 위원이자 수도원 상임위원으로 봉직하고 있는 그를 만났다.
 

여자도 부처가 될 수 있다
고 원로교무의 고향은 장성 삼계 능성리 집성촌이다. 유교 5대 종가집으로 고 원로교무 위로 딸만 둘이었던 그의 부모는 태교에 정성을 다하며 아들이 나오기를 기대했다. 아쉽게도 기대를 저버리고 딸로 태어난 고 원로교무는 ‘우리 집에서는 아들을 원하니까 내가 필요가 없겠다’라는 생각에 어릴 적부터 언제 집을 떠날까가 관심사였다. 당시 학교를 잘 안 보내던 시절이었지만 부유한 가정환경 덕에 그는 초등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한학에 능하고 마을에서 존경받는 분이었다. 학교 육성회장을 하기 좋은 조건이었기에 교장이 직접 집으로 방문해 고 원로교무의 중학교 입학을 권장했다. “중학교를 나와야 사위를 잘 본다고 해서 중학교에 진학했고, 또 졸업할 무렵에는 고등학교는 나와야 사위를 잘 본다 해서 고등학교까지 가게 됐지. 고등학교에 안 갔으면 원불교를 못 만났을 거야.”

고 원로교무 밑으로 귀한 아들을 얻은 그의 부모는 교육을 위해 초등 3학년 때부터 아들을 광주로 유학을 보냈고, 고 원로교무도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훗날 원광대 부총장을 지낸 묘산 김도융 종사가 학교 영어교사로 있어 고3 때 함께 봉사활동을 가게 됐다. 뽕나무 밭에서 잡초를 제거하다 묘산 종사로부터 ‘처처불상 사사불공’ 법문을 접하고 고 원로교무는 깊은 감화를 받는다. “유교에서는 남자만 사람이고 여자는 사람이 아닌데, 풀도 뽕나무도 다 부처라고 하니까 여자도 부처가 될 수 있구나라는 희망이 생겼어.” 

원불교에 대해 좀 더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에 그는 서광주교당을 방문한다. 법회에서 듣게 된 ‘일상수행의 요법’에서 ‘세우고 돌리자’라는 말이 참 좋았다. 입교를 하고 6개월도 되지 않아 그는 출가 서원을 세웠다. 중학교 때 『사명대사』 책을 몇 번이나 반복해 읽으며 출가에 대한 동경이 있었기에 서원을 세우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마침 고등학교 친구였던 교타원 김혜신 교무도 함께 전무출신의 길로 들었기에 더욱 든든했다. 
 

38년간 대종사 친견 제자 모시고 살아
“난 인연 복이 참 많아. 부모님을 잘 만나 사랑과 훈육으로 키워주셨고, 이현조 교무님이 추천을 해주셔서 전무출신을 할수 있는 큰 은혜를 입었어. 또 출가 후에는 50년 교역 생활 중 38년을 대종사님 친견 제자를 모시고 살았지.”

서원관 예비교무시절 아타원 전팔근·진타원 박제현 선진, 영산선원 근무시절에는 형타원 오종태·낭산 이중화 선진, 마산교당에서는 정타원 이정은 선진, 중앙중도훈련원에서는 향산 안이정 선진, 정토회교당에서는 청타원 박길선·동타원 권동화·의타원 이영훈·겸타원 임영전 선진, 서울교당에서는 팔타원 황정신행 선진과 경산상사를, 교정원에서는 좌산상사를 모시고 살았다. 대종사 친견 제자를 모시고 교단을 배우고 훈련을 통해 공부한 힘이 훗날 그가 교구장과 서원관 교감으로 활동하는데 든든한 바탕이 됐다. 

또 출가서원을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은 예비교무 1학년 때 아버지가 열반했지만, 첫 인상에 아버지처럼 느껴졌던 대산종사와 많은 스승님들의 사랑이 있었기에 그는 외롭지 않았다. 퇴임 후 수도원에서도 그는 예타원 전이창 종사를 비롯해 130여 명의 원로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살아갈 수 있음에 감사한 마음을 표했다.
 

모든 일이 보람 있었다
여러 부임지를 돌아보면 보람되지 않은 일이 하나도 없다는 그. 부임 전 항상 연혁과 일지를 살펴보며 그곳에서는 어떤 역할을 하면 좋을지 연마했기에 가는 곳마다 많은 성과를 낼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세 가지만 꼽아 보자면 먼저 영광교구에 교구장으로 부임했을 때 일이다. 

영광교구가 성지수호 교구이긴 하지만 그가 교구장으로 부임할 당시 교화가 약했다. 마침 국가에서 소그룹 다기능 복지시설을 시작하려던 때라 영광교당에 초록 디딤돌 방과 후 학교를 개설했다. “조손 가족 아이들이나 편부모 가정 아이들이 많았는데 장난이 너무 심해서 늘 주변 동네 분들에게 사과하고 다니는 것이 일이었어. 그런데 6개월, 1년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들이 안정돼서 나중이 이 아이들이 학교에 가서 반장도 하고 공부도 1,2등으로 잘해서 방과후 교실에 들어오려고 줄을 서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가 서원관 지도교감으로 부임했을 때는 백년 성업을 앞두고 있었다. 예비교무들과 어떻게 공부를 할까 고민하다 함께 인터넷 법문 사경으로 적공을 시작했다. “인터넷 법문사경이 나온지 3년 정도 됐을 때였어. 법문사경을 완료하면 밥도 사주고 멋진 목탁도 사준다고 장려해서 많은 학생들이 열심이었어. 부모님들도 함께 할 수 있게 권장해서 성과가 있었어.” 처음 시작할 때는 평생 한두 번이나 할 수 있을까 생각했지만 어느덧 그는 인터넷 전서 법문사경을 30회도 넘게 완료했다. 현재는 법문사경 스마트폰 앱까지 개발돼 더욱 접근이 편리해졌다. 지금은 많이 쓰는 데 목적을 두기보다는 매일 빠지지 않고 쓰는 것을 염두에 두고 끊임없이 경전을 연마해가고 있다.

또 한 가지 보람된 일은 그가 여자정화단총단장으로 활동할 때 나의 인생 나의 삶이라는 정화단원들의 자서전을 발간한 것이다. 그는 정화단총회에서 초청특강을 통해 정화 단원들이 직접 자서전을 작성할 수 있도록 안내했고 그 결실이 책으로 엮어지게 됐다. “자서전을 통해 자신의 일생을 돌아보며 잘한 것은 표준 삼고, 잘못한 것은 참회도 하고 생사 정리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았어. 지금도 시간 나는 대로 수도원에서도 자서전 쓰기를 권장하고 있어.”
 

대종사님 교법대로만 하면 돼
그가 대산종사와 예타원 종사에게 사대불이신심을 배우며 신심을 키워가던 중 각산 신도형 종사가 교법에 대한 신을 더욱 확고히 해주었다. “고시공부를 할 때 각산님이 개교의 동기를 강의하시는데 아! 그렇지,그렇게 해서 새 불교가 됐지. 그때 교법에 대한 확신이 더욱 굳어진 것 같아.” 그는 미륵불은 법신불의 진리가 크게 들어난 것이요, 용화회상은 처처불상 사사불공의 대의가 널리 행해지는 것이 라는 ‘전망품 16장’과 ‘대산종사의 네가지 공부 표준’을 일생의 공부 표준으로 삼고 공부해 왔다.

퇴임 후에는 생사대사를 연마하며 원로훈련에서 경산상사가 내어 준 ‘공부인의 4가지 과제(생사일여심, 인과활용, 마음 자유, 중생제도)’와 다생겁래에 일원회상을 떠나지 않겠다는 경산상사의 ‘나의 서원’을 매일 봉독하며 적공에 힘쓰고 있다. 

그가 후진들에게 당부의 메시지를 전했다. “성불제중 제생의세 하는 쉬운 방법이 있어. 찰나만 잘살면 돼. 찰나가 모여서 하루가 돼. 수도인의 하루는 아침에는 수도정진, 낮에는 보은 노력, 밤에는 참회 반성 시간으로 정해서 1주일, 1개월, 1년을 정기·상시훈련으로 10년, 20년, 30년 적공하다 보면 누구나 다 부처가 될 수 있어. 대종사님 교법대로만 하면 돼. 사람 몸 받고, 이 법 만났을 때 모두가 대원정각을 이루면 좋겠어.”

[2020년 5월 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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