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기104년 11월 예비교역자 문답감정

 

문 : 기도를 하는데 일심이 되지 않습니다. 
만덕산에서 100일 기도를 결제하고 현재 회향기도 중입니다. 처음에는 전혀 일심이 되지 않던 기도가 100일이 된 지금 점점 마음에 힘이 쌓이게 됐습니다. 이 힘으로 기도생활을 이어가겠다고 다짐했는데, 막상 해제를 하니 마음이 풀어졌습니다. 어떻게 다시 잡을 수 있을까요. (강법인 예비교무)

답: 하고 또 해야 합니다. 우리는 평생 기도해야 합니다.
사실 나도 기도 공부에 신심이 나질 않았습니다. 선禪은 그 체험이 분명하여 해볼 마음이 나는데, 기도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진리가 응하는지 응하지 않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수학시절 4년간 조석심고를 했어도 처음에는 어떻게 할 줄을 몰라서 손만 모으고 있다가 내린 적도 많았습니다. 조석심고 외에 기도를 따로 한다는 것은 생각도 못하고 살았던 때입니다.
군대를 다녀온 그해 8월, 대산종사님을 접견할 때가 있었습니다. 대산종사께서는 당신 공부하신 말씀 중 기도에 대해 법문 하셨습니다. 20대, 30대, 40대 그 시기마다 기도를 달리 하셨다는 말씀을 듣고 “아, 기도라는 것이 조석심고 외에도 저렇게 따로도 하는가 보다” 그렇게 처음 알게 됐습니다.
종법사님도 그렇게 하셨다고 하니 ‘나도 한번 해봐야겠다’라고 마음을 먹고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인과에 대해 신심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세세생생 대종사님 법 회상에 찾아와서 이렇게 살겠다”하고 기도는 멋지게 하고 있었지만, 마음 저 밑바닥에서는 ‘세세생생 이 공부를 하겠다’는 그 마음이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서지 않는데 기도를 한들 힘이 생길리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내 마음과 합치되지 않는 기도를 해서 무슨 위력을 얻을 수 있겠는가” 그런 생각에 기도 내용을 바꾸기로 했습니다.
“세세생생 이 공부를 하고 싶은데 제 마음이 아직 정해지지 않았으니, 이 마음이 정해질 수 있도록 진리께서 위력을 주옵소서.” 이렇게 내 마음과 같은 기도를 올렸더니 그제서야 일심이 되었습니다. 마음이 세워진 후 8년간 그 기도를 하게 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식사를 마치고 대종사 성탑에 올라가는데 그때까지도 마음에 인과에 대한 믿음이 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성탑 앞에서 기도를 막 시작하는 그 순간 인과가 믿어지는 것이었습니다. 본래부터 믿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이 마음이 참 신기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가다 보니 이 마음이 다시 또 풀어지고, 또 잡고, 그러기를 3년을 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100% 마음 전체가 전심全心으로 신심이 세워지지 않고 90% 정도에 머물러 더 이상 진도가 나가질 않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어떻게 해서 채워가야 할까” 고민이 돼서 다시 2년간 연마를 하게 됐습니다. 그러던 중 나무를 보면서 한 감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나무를 심으면 뿌리를 내리고, 그 뿌리가 커나가면서 나무도 따라 자랍니다. 나무가 처음부터 그 뿌리를 다 내리고 커가는 것이 아닙니다. 생장하면서 뿌리를 굳게 내리는 법입니다.
우리의 마음공부도 그와 같습니다. 정산종사님과 같은 어른은 대종사님을 뵙고, 이 법을 만나자마자 신심의 뿌리를 내리신 분들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뿌리 내린 만큼 그 힘으로 공부를 해서 삼대력을 키워가야 합니다. 삼대력은 나무와 같습니다. 삼대력이 커가면서 다시 또 신심이 뿌리 내리고, 신심이 뿌리 내리면서 삼대력이 쌓여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감상이 생긴 뒤로는 ‘신심공부는 이 정도로 하고 공부에 전념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간단한 것 같지만 나도 이러한 과정을 거쳐 지금까지도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한결같이 쭉 이어가는 것이 이 회상에 사는 힘이 되었습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형식을 너무 강조하지 말고 일생동안 쉬지 않고 공들여야 합니다. 기도는 자신의 마음을 묶고 결제하는데 상당한 도움이 됩니다. 물론 결제와 해제를 반복해서 적공해야 합니다.

문 : 환희심을 찾고 싶습니다.
출가하고 이 회상 만난 환희심이 참 컸습니다. 그런데  요사이 그 기쁨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상성에 빠져 사는 것 같고 일만 하러 나온 교역자 같아 다시 그 기쁨을 찾고 싶습니다. 제가 너무 큰 것을 구하는 것인지, 원래 없는 것인지, 잘못 살고 있는 것인지, 종법사님께 여쭙고 싶습니다. 어떻게 표준 잡고 살아가야 할까요.
김명중 교무(예비교무시절)

답 : 법열로 환희심이 나야
우리가 새로운 환경을 접하면 그 전에 맛보지 못한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외부에서 오는 행복인 경우가 많습니다. 맛있는 음식도 첫맛은 좋을지 몰라도 나중에는 평범해 집니다. 외부환경으로 오는 즐거움은 이내 무뎌지기 마련입니다.
진정한 환희심은 내 마음에서 ‘법열法悅’이 일어나야 합니다. 법열이라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내 마음에 모든 환경을 초탈할 수 있는 신심信心이 서 있으면 법열이 나옵니다. 또 하나는 자신이 직접 공부해서 마음으로 법열을 느끼는 것입니다. 망념이 가라앉고 진성이 드러나면 법열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쉽게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공을 들여서 차츰차츰 그렇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때론 일을 잘하고 남한테 인증을 받을 때도 보람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바깥 요인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때론 교화선상에서 죽도록 애를 써도 교도가 늘지 않으면 마음이 가라앉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도 우리의 마음은 기뻐야 합니다. 이곳에서 심신을 바칠 수 있다는 자체가 기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에 환희심이 나려면 신심으로 이 모든 것을 넘어설 수 있던지, 나의 공부가 진실하여 그 모든 경계를 넘어설 만한 심력心力이 쌓여가던지, 이 둘 중 하나가 병행해야 합니다.
나는 40대 중반부터 그냥 걷다가도 내가 내 자신을 볼 때 어쩐지 마음이 즐거웠습니다. 어렵고 불편한 일을 당하면 마음이 잠깐 그랬다가도 조금 지나면 금새 회복됐습니다. 내 생각에는 보살십지菩薩十地 가운데 ‘환희지歡喜地’가 있다 하셨는데, 그러한 법열을 느낀 것입니다. 겉으로는 웃지 않았지만 마음은 항상 웃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는 경계가 오래가지 않고 마음에 평심平心을 유지하였습니다. 수학시절 나도 요동이 많았습니다. 안개 속 같아 앞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른들을 찾아뵙고 말씀을 받들으면 마음이 열렸으나, 문을 닫고 나오는 순간 다시 마음이 어두워졌습니다. 그때마다 무슨 뜻인지 자세히는 모르지만, 정전 일원상의 진리를 읽으면 조금씩 마음이 환해졌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다 공부의 과정입니다. 그렇게 기도와 선을 해가면서 평범한 생활속에서 적공이 쌓여가는 것입니다. 공부가 후퇴한 것 같이 보여도 하나의 과정인 줄 알고 꾸준히 정진해가면 되는 것입니다.

문 : 감각감상이 잘 잡히지 않아 일기를 의무감으로 기재하고 있습니다.
요즘 저의 고민은 심신작용 처리건은 저의 작업취사와 직접 관계된 일이므로, 사람과 일의 상황에 맞춰 그 시비를 감정하고 죄복의 결산해서 기재하면 되는데, 감각감상과 같은 경우는 ‘대소유무의 이치가 밝아지는 정도’를 기재하려다 보니까 마음에 확실히 깨쳐진 내용이 아니라 막연하기만 합니다. 이러한 고민이 생기니 일기를 의무감으로 기재하고 있습니다. 
국현수 교무(예비교무시절)

답 : 정전 구절구절이 모두 의두요목
감각감상이라는 것은 쉽게 말하자면 진리에 대해서 밝아지는 것입니다. 진리라는 것은 꼭 사물을 보고 깨달음이 생기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처음 교리를 연마할 때, 공부하는 과정에서 의심과 깨침이 있게 됩니다. 법문을 연마하다 보면 이해가 잘 안 되고 걸리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대종사께서는 진행사조인 ‘신분의성信忿疑誠’ 공부 중 “의疑는 일과 이치에 모르는 것을 발견하여 알고자 함을 이름이니, 만사를 이루려 할 때에 모르는 것을 알아내는 원동력이니라” 하셨습니다. 의심이 걸려야 진리가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스승님의 본의를 찾고 말씀의 근원을 궁구해 갈 때 열려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정전 무시선법無時禪法에서 ‘대범, 선禪이라 함은 원래에 분별 주착이 없는 각자의 성품을 오득하여 마음의 자유를 얻게 하는 공부인 바’에서 분별주착이 없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각자의 성품을 오득한다는 뜻이 무엇인지, 계속 궁글릴 때 마음이 열려지는 것입니다. 
사실 정전 구절구절이 다 의두요목입니다. 진실로 의두가 걸리면 확연하게 확인이 되는 각覺의 세계가 열리고, 이후 지도인에게 감정을 받아야 합니다. 지금의 얻음이 맞는지 인증 받아야 합니다. 또한 그후로도 계속 마탁해야 합니다.
우리가 교전을 가지고 공부하다보면, 실지경전을 발견하게 됩니다. 경전은 글자로 만 된 것이 아닙니다. 천지 만물을 볼 때,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수많은 감각이 일어나게 됩니다. 대종경 성리품 10장에서 대종사 봉래정사에 계실 때, 큰 비가 와서 층암 절벽 위에서 떨어지는 폭포와 사방 산골에서 흐르는 물이 줄기차게 내리는 것을 보시고 “저 여러 골짜기에서 흐르는 물이 지금은 그 갈래가 비록 다르나 마침내 한 곳으로 모아지리니 만법 귀일萬法歸一의 소식도 또한 이와 같나니라”라고 하신 것이 그러한 경지입니다.
또한 ‘시비이해是非利害’의 옳고 그름, 이롭고 해로움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대소유무大小有無’를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대소유무에 맞는 것이 시是가 되고, 안 맞는 것이 비非가 되며, 시가 이利가 되고, 비가 해害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대소유무에 바탕하지 않기 때문에 일반적인 사회 통념과 규칙 등에 맞춰서 판단합니다. 우리는 시비이해를 할 때 그러한 시비이해가 아니라 대소유무의 이치로써 시비이해를 봐야 합니다. 현실적 이해만이 아니라 영생의 이해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더 나아가 ‘대의大義’를 잡을 줄 알아야 합니다. 대의를 못 잡으면 부분은 옳을 수 있지만 전체를 잃을 수 있습니다. 반면 큰 대의를 잡아도 부분은 조금 잘 못할 수가 있습니다.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큰 대의가 옳기 때문에 설사 작은 잘못도 큰 잘못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교단 전체를 내 일로 아는 대의가 확실히 세워질 때 시비이해를 잘 운전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이것 잘하자고 공부하는 것입니다. 대소유무만 알자고 공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순서는 대소유무를 먼저 공부하여 확실히 토가 떨어지고, 시비이해를 정확히 볼 수 있는 능력을 키워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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