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산 전음광 대봉도(惠山 全飮光, 1909~1960)

정묘동선을 마친 후 소태산 대종사를 모시고 찍은 가족사진(1928년 2월 26일, 전열 좌로부터 장모 김만공월, 장남 전팔로, 소태산 대종사, 모친 전삼삼과 장녀 전팔근, 후열 좌로부터 전음광, 처남 권대호, 부인 권동화)
정묘동선을 마친 후 소태산 대종사를 모시고 찍은 가족사진(1928년 2월 26일, 전열 좌로부터 장모 김만공월, 장남 전팔로, 소태산 대종사, 모친 전삼삼과 장녀 전팔근, 후열 좌로부터 전음광, 처남 권대호, 부인 권동화)


“인간이 세상에 나와 기왕 신앙을 하기로 하면 허망한 신앙을 하는 것보다는 사실적인 신앙을 가지는 것이 옳을 것이며, 같은 신앙을 올리더라도 편벽된 신앙을 올리기보다 원만한 신앙을 올리는 것이 두말할 필요도 없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에서 크게 유행되고 있는 신앙의 대체를 살펴보면, 이미 미신화 하거나 편벽화 된 점이 많이 있고, 또 단순히 신앙하는 것 그 자체에만 그쳐 전진 능력을 상실한 신앙이 적지 않다.

예를 든다면 알지 못할 운수만을 믿고 자력을 갖추는 데는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운수만 돌아오면 일시에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고 믿고 허송세월을 한다거나, 또 저 하나님만 믿고 보면 언젠가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나를 반드시 천당으로 인도하여서 안락한 생활을 하게 해 줄 것이라고 믿는 것 등이 어찌 미신적인 신앙이 아닐 것이며, 자력 향상을 저해하고 의뢰적 퇴보심을 조장하는 그릇된 신앙이라 아니할 수 있겠는가.

또 일부 신앙인들의 태도를 지켜보면 모든 것을 오직 하나님이나 부처님이나 혹은 자기가 신앙하는 절대자에게 그 공덕을 온통 돌리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누구나 다 알고 있듯이 우리는 한 절대자의 은덕만 입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천지님과 부모님과 동포님과 법률님의 은덕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은덕은 외면한 채 그 공덕을 모두 한 절대자에게 돌린다면 이 얼마나 맹목적이고 편협한 신앙이라 하겠는가.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병이라는 사람을 존모할 때, 갑에게 은혜를 입고도 병의 은덕이라고 하며 을에게 은혜를 입고도 그저 병의 은덕이라고만 한다면, 갑과 을이 그 사람을 생각할 때 오죽이나 허망한 사람으로 볼 것이며 또 방관자라 하더라도 오죽 허망한 사람으로 취급할 것인가. 하지만 우리가 신앙하는 이 사은 신앙은 지금 유행하는 모든 신앙 가운데서 발견할 수 있는 결점만큼은 최소한 초월한 신앙이라고 자부할 수 있다. 

근래 하늘을 믿으면 하늘이, 운수를 믿으면 운수가 우리에게 복락을 준다하여 복락을 받을만한 일은 하지 않은 채 오직 신앙만으로 의뢰심을 조장하는 폐해가 적지 않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은 믿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사은을 신앙하는 동시에 그 은혜를 갚아가는 것으로써 진정한 신앙을 삼나니, 의뢰적 신앙에만 그쳐 전진심을 상실하는 결점이 없는 까닭이 자연 천지 같은 위력과 수명을 얻어 장차 그 복락이 한량이 없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우리의 신앙처가 오직 사은이라 한다면 그 사은을 발견하신 종사주에게 올릴 신앙심은 어찌할 것이냐는 의심할지 모른다. 그러나 종사주의 은덕도 이미 사은에 포함이 되었으므로 사은을 진실히 신앙할수록 종사님에게 진실한 신앙을 올림이 되나니, 오직 우리 동지들은 질에 있어서 실답고 양에 있어서 원만하며 자타력 병진으로써 모든 신앙에 뛰어난 이 사은을 진실히 신봉하여 이 공부 이 사업에 더욱 용맹정진하기 바란다.”
 

혜산 전음광 대봉도가 원기19(1934)년에 교단의 기관지 ‘회보’ 7호에 발표한 회설 일부를 축약한 것이다. 비록 76년 전 발표된 구문이지만 지금 이 시대에 내놓아도 전혀 부족함이 없는 글이다. 이 글을 발표할 당시 혜산 대봉도의 나이는 불과 25살이었다. 코로나 19로 종교의 필요성과 그 역할에 대한 사회적 질문들이 많아지고 있는 요즘, 한 시대를 앞서나갔던 선각자 혜산 대봉도의 삶의 자취를 더듬어보도록 하자.

혜산 전음광 대봉도(본명 世權·법호 惠山)는 1909년 8월 2일 전북 진안군 마령면 평지리에서 부친 전영규 선생과 모친 전삼삼 여사 사이에 외아들로 태어났다.  가세는 500석을 거둘 정도로 넉넉했으며 성격이 활달하고 두뇌가 명석해 주위의 촉망을 받았다고 전한다. 6살 때부터 서당을 다니면서 한문을 익힌 후 보통학교에 진학해 신교육의 혜택을 받았다. 또 10살 되던 해에는 전북 장수군 산서면 오산리 권 씨 문중의 권동화 종사와 결혼했다. 

그러나 그 이듬해에 가사를 책임지던 부친이 열반을 한데 이어 믿었던 사람에게 가산 관리를 맡겼다가 큰 손실을 입으면서 가세는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혜산 대봉도가 원불교와 인연이 된 것도 바로 이 무렵이다. 혜산 대봉도가 13살 되던 해 모친 성타원 전삼삼 선진이 삼타원 최도화 선진에게 생불님이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안내로 소태산 대종사가 머물던 부안 봉래정사를 찾아갔다가 감복해 제자가 된 것이 시작이었다. 

혜산 대봉도는 그 이듬해인 원기8(1923)년 어머니를 따라 진안 만덕산으로 가 소태산 대종사와 부자지의를 맺었다. 소태산 대종사는 마침 가정 형편상 전북 임실로 이사를 준비 중이었던 성타원 전삼삼에게 ‘임실은 적지가 아니니 전주로 이사를 하라’고 일렀고, 성타원 전삼삼은 남편의 3년 탈상을 마치지마자 전주시 완산정으로 이사를 해, 소태산 대종사가 이곳에서 새 회상 창립 인연들을 규합하고 창립 준비모임을 할 수 있도록 장소를 제공했다.

혜산 전음광 대봉도는 원기9(1924)년 이른 봄, 당시의 시국 정세와 새 회상 전진기지를 물색하기 위해 상경하는 소태산 대종사를 따라 경성에 머물며 1개월간 시봉의 도를 다하고 돌아왔는데, 귀향을 하자마자 깨달은 바가 있었던지 그동안 다니고 있던 전주제일보통학교 5학년을 중퇴하고 출가를 단행했다. 그 해 이리 보광사에서는 불법연구회 창립총회가 개최되었는데 대종사는 창립총회를 마친 뒤 그에게 음광(飮光)이란 법명을 주었다.

혜산 대봉도는 불법연구회 창립총회 후 한 달 간 만덕산에서 열린 선에 참여하여 신심을 더욱 굳혔고, 소태산 대종사가 익산에 종교공동체 건설을 시작하자 그 옆에 사가를 지어 이사를 단행했다. 혜산 대봉도는 주산 송도성과 함께 “너희는 내 두 눈이다”라고 할 정도로 소태산 대종사의 신임을 받았다. 그의 나이 17살이 되던 해 수위단 대리단원(육산 박동국 대리 이방단원)에 임명된 것만 보아도 소태산 대종사의 신임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원기13년 교무부 서기, 원기17년 연구부장, 원기20년 교무부장, 원기23년 법무, 원기26년 서정원장 등을 역임하며 교단의 초창기 여러 난제를 능란하게 헤쳐 나가며 소태산 대종사를 지근거리에서 보필했다. 그는 활달한 음성으로 청중을 감동시키는 웅변가였으며, 예리한 필치로 문제의 핵심을 논리적으로 전개하는 명 논설가였다. 특히 수많은 논설을 통해 교단과 인류가 나가야할 바를 명쾌한 필치로 비전을 제시하며 소태산 대종사의 경륜과 포부를 전하는 작업을 했다. 

특히 불법연구회규약 등 초기교서들이 발간될 때 발행인이 되어 일제 탄압의 방패막이 역을 담당했다. 그는 어느 누구보다 많은 글을 남겼다. 월말통신, 월보, 회보에 나오는 95편의 회설 중 83편을 썼다. 그의 논설들은 대부분 소태산 대종사의 경륜과 포부를 해설하고 현실화하기 위한 것들이었다. 특히 공익사업에 대한 식견은 남달라서 어린이 교육을 위한 유아양성소 설치며 유치원 설립, 우리 교법으로 지도할 수 있는 학교 설립, 양로원 개설, 병원 설립, 남자 교역자 생활에 이르기까지 여러 문제와 그 해결방책을 제시했다. 

“과실을 항상 자신에 구하는 자와 과실이 있다 하더라도 백절불굴의 의지로 정진하는 자는 결국 성현군자의 지위에 오를 것이요, 과실을 항상 타인에게 구하거나 과실을 허물하여 중도이폐지(中道而廢之)하는 자는 범부 소인의 자리에 머무르고 말 것이다.”

“성품이란 본래가 없으며, 시종이 없으며, 선후가 없는 것이니, 이 성품을 알고 보면 사리에 걸림이 없을 것이요, 이 성품을 키우고 보면 사리에 끌림이 없을 것이요, 이 성품을 사용하고 보면 정의와 불의가 절도에 맞아 잘못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물건도 제일 귀하고 값나가는 물건을 사기로 하면 돈을 많이 준비하여야 되는 것과 같이, 공부 중에도 위없는 이 도덕공부를 하기로 하면 지광지대한 발원과 이 몸이 희생되는 한이 있더라도 변치 않을 신성이 있어야 한다.”

혜산 대봉도는 송도성, 조갑종과 더불어 교단 3총사라 불릴 정도로 뛰어난 역량을 가진 인물이었다. 하지만 혜산 대봉도의 자취는 소태산 대종사의 열반과 함께 교단사에서 서서히 지워져갔다. 소태산 대종사 열반 2년 후, 혜산 대봉도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든 공직을 내려놓고 사가로 돌아갔다. 그의 나이 36세였다. 혜산 대봉도는 1960년 51세를 일기로 사가에서 열반했다. 

/경장교당

■ 혜산 전음광 대봉도 약력
- 1909년 6월 17일 전북 진안 마령 평지리 출생
- 원기 9년 4월 29일 모친 성타원 전삼삼 선진 연원으로 입교
- 원기 13년 교무부 서기
- 원기 20년 교무부장
- 원기 23년 법무
- 원기 26년 서정원장
- 원기 28년 공익 서무부장
- 원기 45년 7월 21일 신용리 자택에서 열반

[마음공부섹션 12호-2020년 4월 2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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