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산 박창기 대봉도(默山 , 1917~1950)

 

출가서원의길, 대종사와 은자결의
“일원상을 받드는 것은 불상을 받드는 것과 같으나 복을 구하는 대상求福이 아닌 심적 대상물이라, 이 심불心佛을 수행의 표본으로 이를 깨닫고見性, 지키고養性, 사용하자는率性 것이니라. 또한 사심邪心이 동動하지 않는 것이 정신수양이요, 일원의 이치를 알아가는 것이 사리연구요, 원만히 사용하는 것이 작업취사이니, 이렇게 하면 삼명육통三明六通이 차차 이루어지게 되나니라. 과거 불교 회상에서는 견성을 한 사람이 극히 드물었으나 앞으로 우리 회상에서는 어리석은 사람은愚者 3년, 지혜 있는 사람은智者 3일에 구하는 사람도 나올 것이니라.”
묵산 박창기 대봉도가 원기23년 
3월 총부선원에서 소태산 대종사의 말씀을 수필해 남긴 것을 읽기 쉽도록 윤문한 글이다. 우리 회상은 등상불 신앙이 아닌 법신불 신앙을 한다는 이야기와 이 일원상을 수행의 표본으로 삼학 수행을 하면 삼명 육통을 이루게 될 것이라는 취지의 말씀이다. 소태산 대종사님이 열반의 길을 떠나신 쓸쓸한 6월에 그 성음이 담긴 편편 법문들을 찾아 나섰다가, 무려 151편의 법문을 수필해 남기신 묵산 박창기 선생과 만났다. 묵산 박창기 대봉도는 소태산 대종사 열반 1주기를 맞아 대종사의 성음을 기록한 법설집을 발간해 남기셨는데  당시 그의 나이는 스물일곱에 불과했다.
묵산 박창기 대봉도는 1917년 서울에서 부친 박장성 선생과 모친 이공주 종사 슬하에서 장남으로 출생했다. 어린 시절부터 명민하여 주위의 촉망을 한 몸에 받았으며, 경성부속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 신학문을 익혔다. 하지만 3학년이 되던 해 “더 이상 학교에서 배울 것이 없다”라며 돌연 학교를 중퇴하고, 모친인 구타원 이공주 종사를 따라 출가를 단행해 전무출신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소태산 대종사와 은자결의를 맺은 후 대종사가 열반의 길을 떠나기 직전까지 11년간 곁을 떠나지 않고 가까이서 시봉의 도를 다했다. 묵산 대봉도가 소태산 대종사와 함께한 11년은 그야말로 구전심수의 삶이었다.  

대종사를 시봉하고 후진을 양성
묵산 대봉도가 출가를 해 처음 맡은 일은 조실 청소였다. 하루는 묵산 대봉도가 걸레를 대충 짜 건성으로 대종사님 방청소를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대종사께서 안 되겠다 싶었던지 “야, 걸레 이리 내라” 하시고는 걸레를 받아 구석구석을 다시 야무지게 닦아냈다. 묵산 대봉도가 그 모습이 죄송했던지 “아니 대종사님 같이 복족족혜족족 하신 성인이 무슨 그까짓 청소를 하십니까. 저 같은 중생이나 복 짓게 걸레를 다시 제게 주세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대종사께서는 “너는 내가 더 이상 닦지 않아도 복락이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아무리 부처를 이루었다고 하더라도 계속 닦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닦는다”라는 법문을 내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묵산 박창기 대봉도의 뛰어난 점은 교단의 미래를 혜안으로 내다보고 개척해 나갔던 진보적이고 혁진적이며 실용적인 뛰어난 사상가이자 실천가였다는 점이다. 묵산 대봉도가 서른넷이란 짧은 나이로 열반의 길을 떠나지 않았다면 아마 우리 교단의 현재와 미래는 또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자동차를 찾아보기도 어려운 시절에 앞으로는 소태산 대종사를 자동차로 모시고 다니게 될 것이라며 운전면허를 따셨다는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 묵산 대봉도, 특히 그는 교단의 미래가 교육에 달려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자신의 사재를 털어서까지 인재육성에 남다른 심혈을 기울였다.
총부 인근의 전무출신 자녀를 모아 교단 최초 어린이회이자 최초 원친회라고 할 수 있는 ‘자공회子供會’를 결성한 것도 묵산 대봉도였으며, 해방 직후 자신의 사재를 털어 정성숙, 전팔근, 김대현, 정경호, 정자선 선진 등을 서울로 유학을 보낸 것도 묵산 대봉도였다. 묵산 대봉도는 특히 1942년부터 해방되던 해에 이르기까지 총부학원 교무로 후진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는데, 불교정전, 반야심경, 휴휴암좌선문, 신심명, 불교학 등 다방면에 걸친 그의 강의는 명 강의로 이름이 높았다. 당시 재가 청년들 가운데는 총부에 잠시 들렀다가 묵산 대봉도의 강의를 듣고 전무출신을 서원하고 나선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대종사법설집, 초기교단의 기록
묵산 대봉도는 1937년 8월부터 1943년 4월까지 약 7년 여간 소태산 대종사가 설한 법문들을 기록한 역작 ‘묵산 수필 대종사 법설집’을 남겼다. 초기 교단의 기록관이라 할 수 있는 회보가  1940년 일제의 강제에 의해 폐간이 되면서 소태산 대종사 법설은 그 어디에도 기록될 공간이 없었다. 그런데 이 공백기에 대종사의 법설을 빠짐없이 기록해 후세에 전한 사람이 묵산 대봉도이다. 자칫 잃어버릴 뻔한 주옥같은 법문들을 우리에게 전해줬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묵산 대봉도의 공로는 그 어디에도 비교할 바가 없다. 그러면 잠깐 묵산 수필 대종사 법설집의 세계로 들어가보도록 하자.
“불교를 실지에 활용하라. 평상시에 공부를 하지 않으면 일을 능히 할 수가 없고, 하지 않는 사람은 중도에 맞지 않고 성공하지 못한다. 불법을 이용하면 사람이 모두 경계를 대하여도 죄가 생기지 않음이 무사와 같아 백발백중이니 이것이 부처님 가르침의 효과이다. 지행이 고르지 않으면 실로 알지 못한 것이니 방심하지 않아야 한다.”
“너는 불법을 어찌 아느냐? 재래 불교에서 말하는 내세는 본회에서 말하는 현세이니 이는 다같은 것이다. 재래 불교 또한 현세를 잘 산 뒤에 미래에 극락에서 태어난다고 하는 것이니 현세에 잘 살아야 후세에 잘살게 되는 당연한 이치이다. 극락은 고락이 없는 곳이니 생활하는 가운데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고락의 법을 발견하여야 현세 극락을 얻을 수 있다.”
“죄업을 멸도시킴에는 상·중·하근기가 다른 점이 있나니라. 상근기 사람으로 말하면, 그 하나는 육도 변화의 진리를 알아 처음부터 인因을 맺지 않아서 과果를 쉬게 함이요, 그 둘은 인과의 이치를 알아서 인연과를 반복하지 않음이요, 그 셋은 고락을 초월하여 고과苦果를 받을 때에 오히려 감수하나니라. 중근기 사람은, 그 하나는 인과의 이치를 알아 수행 정진하여 악도惡途에 떨어지지 않는 고로 항상 인도人道에 나서 과보를 적게 받음이요, 그 둘은 인도人道에 수생하여 지위가 높아 능히 상대되지 않는 고로 과보를 적게 받음이요, 그 셋은 덕을 널리 중인에게 찬양하는 고로 능히 훼손치 못함이니라. 하근기는, 우매작죄愚昧作罪할 뿐인 고로 가히 말할 바 아니니라.”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
어쩌면 묵산 수필 대종사 법설집은 묵산 대봉도가 후인들을 위해 남긴 마지막 유작이라고 할 수 있다. 묵산 대봉도는 한국 전쟁의 와중에 팔타원 황정신행 종사의 아들 강필국의 피난을 돕기 위해 현 한국보육원이 자리한 양주농장에 들어갔다가 강필국과 함께 34세의 나이로 어처구니없는 최후를 맞았다. 묵산 대봉도는 비록 34년의 짧고 굵은 생애를 살았지만 우리 회상에 남기고 간 족적은 매우 컸다. 시대를 앞서간 진보주의자로, 혁신주의자로, 실천운동가로 우리 곁을 다녀간 시대가 요청하는 그리운 선진 묵산 박창기 대봉도.
“교단 일에 있어서 아무리 당파 짓는다고 비난하나 공公은 공公으로 사私는 사私로 나타난다. 아무리 공심을 주장하나 그의 마음속에 사私가 숨어있다면 결국 그 사가 나타나고 만다. 시간은 최고의 재판관이다. 일시적인 비난을 두려워말고 사심 없이 실력만 길러서 열심히 일만 하자. 마음속의 공公을 아무리 비난한다고 사가 될 리 없고, 아무리 사를 공으로 위장한다고 그 사가 공이 될 수 없다. 인因은 어느 누구도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일평생 공심으로 살다가 묵산 대봉도가 남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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