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종사 말씀하시기를 「대종사께서 “내 법이 정법이라면 지금 사람이 없어도 걱정하지 않는다. 천년 만년 뒤에라도 이 법을 정법으로 아는 한 사람이 나오면 된다.” 하셨나니 그대들은 걱정하지 말고 그 한 사람이 되는 데 노력하기 바라노라.」 대산종사법어 회상편 37장 

 

4대를 책임질 인물
교단 4대말이 몇 년입니까? 원기144년입니다. 지금부터 39년 남았습니다. 여기에서 제일 나이 적은 사람이 21살이라 하니, 교단 4대말이 되면 그 사람 나이도 60살이 됩니다. 그 나이면 한창 좋을 때입니다. 아마 한 40년 후에는 그때 나이 80살이 지금 60살 정도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도 20살에 원불교학과에 입학했습니다. 그해 여름방학 때 금강리에 계셨던 대산종사님을 찾아뵈니, “너희들이 100주년 때 몇 살이냐?”하고 물어보셨습니다. 그때가 원기52년이었습니다. 얼른 속으로 계산해보니 100주년까지 48년이 남았습니다. 대산종사님께서는 그때 벌써 100주년을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여러분 생각에 4대 말이면 멀게 느껴집니까? 가깝게 느껴집니까? 나도 그 당시 100주년이 실감 되지 않았습니다. 50년이나 남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100주년이 지나 교단은 2세기를 맞이했습니다.
나는 여러분을 볼 때 제일 좋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교단의 미래이기 때문입니다. 40년 후 교단을 책임지고 갈 사람들이 바로 여기 있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이 일찌감치 철이 들어서 성장하면 그때 교단이 괜찮을 것이고, 천방지축으로 철들지 않으면 교단은 흔들흔들 할 것입니다. 
교단이 4대 말이 지나면 그 다음은 
5대 초가 됩니다. 여러분들이 꼭 나와 비슷할 것 같습니다. 내가 학교 들어왔을 때 “나는 3대 인물이구나”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3대는 아직 끝났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나이 때를 보면 꼭 그때입니다. 여러분들은 ‘4대 인물’입니다. 이중 대부분이 3대 말 졸업해서 교화현장에 나갈 것입니다. 현장에 나가면 주도하는 역할은 아니지만 교단 구석구석에서 일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때부터 시작해서 일생의 전 과정이 4대를 담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4대 말이 되면 여러분들도 무언가 자리를 잡아서 나와 같이 교단의 지도자급이 될 것입니다.
나는 영산선학대학교에서 6년을 살면서, 학생들을 향한 애정이 커졌습니다. 종법사 일을 확 줄여버렸습니다. 진실로 중요한 일은 여러분과 이렇게 문답하고 공부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어느 단체, 어느 조직이고 100% 전체가 자신의 역할을 해주면 좋겠지만 사실 그것은 욕심입니다. 그중에 중심 역활하는 인물이 커나가고, 또 그것을 받침해주고, 조금 부족한 사람도 따라오게 하면서 세대교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 한사람이 되어야
예전에 대산종사님께서 ‘그 하나라도, 그 한명이라도’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여러분도 살다보면 옆에서 누군가 놀고 있으면 함께 놀고 싶습니까? 아니면 내가 더해야겠다는 마음이 납니까? 나는 열심히 정진하려  하는데 옆에 도반이 좌선도 안 나오고 공부하지 않으면 나도 쉴까 그런 마음이 나나요? 어떤 마음이 나나요? 내 공부는 내가 하는데 다른 사람이 안하면 그 사람이 미워집니다. 자기가 공부 안하면 자기가 실력이 늘지 않는 것인데, 결코 미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그러므로 옆에서 놀든지 잘하든지 그 사람에게 맡기고, “나는 대종사님과 법과 스승님께 확실히 표준해서 나 한 사람이라도 더 노력하자.” 그렇게 그 하나가 딱 서면, 교단의 기운이 바로 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가 설 때 그 하나가 하나가 아닙니다. 노는 사람 옆에 노는 사람이 따라 붙듯이 공부하는 사람 옆에는 공부하는 사람이 따라붙게 돼있습니다.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셋이 되는 것입니다.

공부하는 사람이 교단을 책임져야 
그러므로 교단의 힘은 결국 누가 갖고 가겠습니까? 공부한 사람이 책임지는 것입니다. 대산종사님께서도 그 전에 일하실 때 뵈오면 혼자 그 일을 다 못하십니다. 주변에 그 어른의 뜻을 받들고 합력해 주시는 분들이 계셔야 교단사가 이뤄지는 것입니다. 어떻게 종법사 혼자 다 해낼 수 있겠습니까. 대산종사님을 뵈면 그 어른을 모시고 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분들 데리고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분이 예타원 전이창 종사입니다. 교단이 남한강 사건으로 상상할 수 없는 고난을 겪을 때 대산종사께서는 중앙훈련원(지금의 원불교대학원대학교)을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집을 지으려면 막대한 자금이 들어가는데 돈 한 푼도 안주시고 예타원 종사님에게 그 책임을 명하셨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무리 어른 말씀이라도 도저히 불가능한 일을 시키면 못 하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일을 시켰으니 못하겠다고 하면 당연한 일 아닌가요. 예타원 종사도 그렇게 불가능한 일을 명받았으니 그 걱정이 얼마나 크셨겠습니까. 당신 능력으로는 도저히 안 될 것 같고, 어른은 하라고 하고. 그래도 예타원 종사는 종법사님께서 하라고 하시니 작정을 하고 그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때 대산종사께서는 당신에게 들어온 약간의 시봉금을 주시면서 “이 일이 하늘이 응하지 않으면 하늘이 하늘이 아니고, 땅이 응하지 않으면 땅이 땅이 아니다”라는 법문을 해주셨습니다. 나는 그 법문을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그런 죽기 살기의 정성과 원력으로 그 건물을 지었습니다. 그 당시 교단은 남한강 건으로 기운이 확 처져 있었습니다. 내일 모레 교단이 기로에 처해있었습니다. 도저히 해결할 경제적 여력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훈련원을 짓고 훈련 시키셨습니다. 
어른들의 경륜을 보면 무서운 데가 있으십니다. 상상할 수 없는 경지가 있습니다. 예타원 종사께서 “도저히 이 일은 안 될 일이다” 생각했다면 이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판단입니다. 그렇게 착수를 안 했으면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러면 그 일을 누가 하겠습니까? 당신 생각으로는 도저히 안 될 일이지만 어른이 하라고 하셨으니 온 정성을 들이고, 되고 안 되고는 하늘에 맡기셨습니다. 당신으로서는 최대한 정성을 들여서 그 일을 끝내셨습니다. 그렇게 큰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결코 많은 사람이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재가출가 전 교도가 교단의 한 모퉁이씩 책임지고 일합니다. 그렇지만 교단의 중추가 되어 대종사님의 법을 받아 행 하신 어른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4대 인물이다’ 마음을 먹고 결복 교운인 4대를 열어가는 주인공이 되어야겠습니다.

<문답감정>
문 : 밖으로 향한 마음을 돌이키고 싶습니다. 
출가를 서원했지만 마음엔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일어납니다. 마음이 밖에 있으니 생각이 많아집니다. 이제 그 눈을 안으로 돌려보려 하지만 사실적으로 공부하려하니 많이 힘들고 괴롭습니다.

: 엎어졌다고 놓아버리면 멍청한 사람입니다. 
그런 괴로움이 없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세월이 많이 흘러야 합니다. 그렇게 금방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을 하건, 하지 않건 그 시절 그런 고민이 없다면 그분은 정산종사님입니다. 대종사님께서는 상근기는 드물고, 대부분 중하근기라 하셨으므로, 누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러한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꾸준히 공을 들이고 가느냐, 중간에 “에라 못 하겠다”하고 그만두느냐 그 차이일 뿐입니다. 결국엔 그 마음을 다시 살려 나가고 또 살려서 나가는 그 마음과 엎어졌다고 놓아버려야겠다 이렇게 마음을 먹는 그 두 차이입니다. 어떤 사람이 근기가 굉장히 높고 무엇이 잘 되어서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분은 드뭅니다.
정산종사님과 대산종사님과 같은 어른들은 큰 근기이십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은 몇 천년을 두고 세상에 몇 분 안 오시는 부처님이십니다. 그런 어른들과 우리를 비교해서 “나는 왜 이렇게 못하느냐” 생각하는 것이 멍청한 일입니다. 못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 하면 되게 되어 있는 것이 진리입니다.

문 : 스승님을 모시는 마음이 약합니다.
어떻게 하면 정산종사님, 대산종사님처럼 한때도 스승님께 마음 떠나지 않고 모실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제 몸과 마음을 다 바칠 수 있을까요.

: 특별한 묘법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챙기고 다시 챙겨서 나가는 길 뿐입니다. 보통 우리가 수행이라는 것을 ‘자력自力’이라 합니다. 자력이 약할 때는 안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심이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자력으로만 살고자 하고, 그 부족한 힘을 스스로 자책하면 참 힘듭니다.
거기에 조금 더 보탬이 될 수 있는 것이 바로 ‘타력他力’입니다. 수학시절 마음이 복잡하면 대산종사님 계신 곳에 가면 싹 녹아서 돌아옵니다. 살다가 마음이 가라앉으면 스승님께 갑니다. 직접 말씀을 받들지 않아도 그 옆에 가면 다 녹아서 옵니다. 동산선원에 각산종사께서 계셨는데 그 어른을 모시고 말씀을 받들면 마음이 좋았습니다. 대산종사께서는 정확히 시간 생활을 하시니까 산책 나오실 때 외에는 뵙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법무실 법무이신 장산종사님을 자주 찾아뵙고 정 마음이 해결 안 될 때는 여쭙고 나왔습니다. 그러한 것이 바로 타력입니다. 타력은 나를 전적으로 변화를 시키지 않아도 공부에 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자력이 확고히 서지 않으면 언제나 돌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급하게 마음먹지 말고 항상 자력과 타력을 병행해야 합니다. 
신심이란 것도 한도 끝도 없는 것입니다. 신심이 바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지금도 해결이 안 됩니다. 이 신심도 영생을 가지고 공부해야 합니다. 어느 때, 어느 순간 신信이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이 완성되면 법력도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챙기고 또 나가야 합니다.

: 윤회와 업이 궁금합니다.
할머니의 천도재를 지내면서 윤회와 업에 대해 의두가 걸렸습니다. 업이 다음 생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요?

답 : 업과 윤회를 아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어제 생각이 오늘로 이어지나요? 안 이어지나요? 어제 생각이 오늘 생각으로 이어집니다. 몸은 어제 몸과 오늘 몸이 같은가요? 다른가요? 대체적인 형상은 같지만 몸은 어제보다 생로병사의 과정을 거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느끼지 못할 뿐이지 몸은 어제 몸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제의 마음은 오늘의 마음으로 그대로 옵니다. 그건 그대로 오는 것입니다.
업이라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만일 어제 돈을 빌렸다면 오늘 안 갚아도 될까요? 어제와 오늘은 다르니까. 그러나 그 빚은 반드시 갚아야 합니다. 이와 똑같은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명색(名色)을 감추니까 그렇게 착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명색과 다른 명색은 전혀 다른 나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업이 이어지지 않는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마음은 변화가 없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마음, 습관, 습성 등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 종자로 가지고 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몸을 기준으로 전생, 현생, 후생으로 보지만, 몸이 아닌 마음으로 보면 전생도 없고 현생도 없고 후생도 없습니다. 그냥 그것이 그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하루하루 변화하고 계속 달라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못 느끼고 삽니다. 그 변화가 쌓이고 점점 커지니까 이때서야 달라졌음을 느끼는 것입니다. 전생·현생·후생이나, 어제·오늘·내일이나, 과거심·현재심·미래심이나 그 이치는 다 똑같습니다. 진리의 변화라는 것은 그 찰나에 있는 것이지, 하루에 있는 것도 아니고, 한 달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원기105년 4월  11일 예비교역자 훈증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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