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마른 이의 목을 축이는 감로수가 되어
영세한 개척교화 지원과 국제교화에 필요한 인재양성
산업역군에서 교단의 참 봉공인으로

[원불교신문=윤관명] 5월의 끝자락, 용인으로 향하는 도로를 따라 신록이 짙어지고 있었다. 여전히 청년의 미소를 지닌 수산 박제륜 대호법(須山 朴濟倫 大護法)을 만나 근황을 묻자 “눈부신 푸르름과 희망찬 5월을 아쉽게 보내고 있다”라고 답했다. 그의 담담한 음성에서 코로나19로 인해 5월을 즐기지 못하는 아쉬움이 아니라, 현실의 어려움 속에서도 자연의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는 여유로움과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다. 


나 말고 그 사람이 참 보살이지
인터뷰를 시작하자 박 대호법은 “우선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내가 대호법을 받았지만 아내인 교타원이야말로 참 보살이야. 그런데 병마로 힘든 삶을 사는게 참 안타까워”라며 잠시 말문을 멈췄다. “교타원은 서울대 가정학과를 졸업한 이후 중학교 교사로 14년간 교편에 있으면서, 이동이 잦은 나를 따라 직장을 옮겨다녔어. 그러다 20여 년간 출판사 ‘김영사’의 편집실장으로 근무했는데 늘 금강경 공부를 즐겨할 만큼 불심이 장했지. 교타원은 스승님 같은 시아버지(상산 박장식 종사)와 친언니같은 시누이(진타원 박제현 종사) 덕택에 자연스레 원불교인이 됐어”라며 교타원 이성훈 교도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렇게 보살같던 사람이 병고에 시달리자 원망심도 일었지만 ‘공업(共業)’이라는 말에 원망심이 녹아내렸다”라며 여러차례 고비를 넘겼던 사연을 잠시 풀어놓았다. “늘 내 뒷바라지를 해주던 아내의 병고를 돌보는 일이 이제 나의 하루 일과가 됐다”라며 “내게 온 이런 어려움과 고통이 생사공부를 하는 계기가 됐고,  삶을 돌아보게 하는 큰 공덕이 됐다”라고 했다. 그의 모습에서 힘든 상황을 적공의 시간으로 돌리는 수행자의 삶을 엿볼수 있었다. 


유년시절 익산총부와 정산종사의 기억
그는 출생부터 원불교와 깊은 인연으로 시작됐다. 초창기 남원교당 자리가 그가 태어난 사가였다. 부친 상산종사와 모친 남타원 강성수 정사의 3남2녀중 3남으로 태어나 일찍 익산총부로 이사하면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는 “그때는 아주 어렸지만 정산종사께서 훈훈한 표정과 말씀으로 ‘왔느냐’ 하시며 반기던 모습이 아직 눈에 선하다”라며 정산종사를 회고했다. 중학교 때 일찍 모친이 열반에 드는 아픔을 겪었으나 부친의 자애로운 가르침을 받으면 성실한 청년으로 자랄 수 있었다.


청년시절, 서울교구 청년교화의 전성기를 함께하다
그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 진학해 서부터 초기 직장생활을 할때까지 종로교당과 서울교당을 다녔다. 원기50년부터 교화부장을 맡아 서울·원남·종로교당 청년회를 연합하며 청년교화를 활성화 했고, 서울 청운회 초기창립에 일조했다. 활발한 교화활동으로 100여 명의 청년회원이 함께 법회를 보던 청년교화의 전성기를 생생하게 기억하는 그는 청소년 교화가 어려운 지금의 교단을 걱정하며 “젊은 인재양성이 절실하다”라고 강조했다. 

원기68년부터 대치교당 교도부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초창기 교당의 주인으로 교당 이전과 확장 불사에 적극 협력했다. 이때 아내 교타원 이성훈 교도와 함께 총6천만 원의 건축기금을 희사해 대산종사로부터 표창을 받기도 했다. 초창기 대치교당 부회장을 6년간 역임하고, 원기74년부터 9년간 교도회장을 맡아 교당 발전과 교화 성장에 정성을 다 했다. 


사회교화·국제교화·인재양성에 힘써
그는 원기83년(1998) IMF사태로 사회경제가 어려운 시기에 서울교구 청운회장의 역할을 맡아 서울 원음방송국 설립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앞장섰다. 또한 청년회·대학생회와 함께 ‘맑고 밝고 훈훈한 세상을 만들기 위한 캠페인’을 서울시 중심가(서울역·명동성당)에서 전개하는 등 다양한 사회 교화활동으로 서울교구 청운회의 위상과 기반을 확충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교화에 대한 열정과 관심이 특별한 그는 미주선학대학원대학교에 교육후원과 예비교무 용금을 지원해 국제교화에 필요한 인재양성에 이바지하고, 사)아프리카어린이돕는모임의 창립 이사로서 최근까지 활동해 해외교화에 특별한 정성을 쏟았다. 해외출장이 잦았던 젊은시절, 그는 미국 출장 중 상산종사가 미주교구 교령으로 머물던 삼보사를 찾았다. 그 때의 열악한 해외교화현장을 보면서 무척 가슴 아팠다고 회고했다. 


교단 경제 후원사업을 위한 전문인
상산종사의 아들로 더 익숙한 그는 그렇게 불리기에는 교단에 끼친 업적과 공덕이 특별하다. 그는 1964년 효성그룹에 입사해 30년간 안양과 울산,언양 등에서 공장장, 서울 본사 전무이사로 근무하며 다양한 업무를 맡아 회사 발전에 기여하며 전문인으로 자리잡았다. 원기79년(1994)에는 전문직 교도들이 모여 수행하는 ‘대원회’에서 활동하면서 (주)영촌산업을 설립해 창립 대표이사로 15년간 활동했다. 그는 오랜 전문경력을 바탕으로 사업을 발전시켜, 원기86년(2001년)에는 (주)대원디지털을 창립해 구미공장 준공 및 봉고식을 올렸다. 이곳은 삼성전자의 휴대폰 부품제조 협력업체로 인정받는 기업으로 주식57%를 교단에 희사해 교단 경제에 크게 이바지했다.


상산종사 유훈 받드는 교단의 참 봉공인
목마른 이의 목을 축이는 감로수처럼 자력없는 개척교당과 해외영세교당의 자립을 돕고자 했던 상산종사의 유훈을 받들어 감로재단 이사직을 맡고 있는 그는 “감로재단은 개인의 재단이 아닌 공익재단으로 좌산상사와 상산종사의 교화정신과 원불교 미래교화를 진작시키려는 염원이 담긴 것이다”라며 “교화프로그램 공모를 통해 교화현장이 새로운 교화대불공을 적극적으로 펼쳐나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라고 밝혔다. 그는 “교단의 각종 공익 재단사업회의 영세성을 탈피하기 위해서는 중점사업회로 통합해야 하며, 젊은 인재 발굴과 교육에 교단의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일생동안 교단 발전을 위해 전문인의 역량 발휘에 헌신했던 수산 대호법. 그는 참다운 주인 정신을 가지고 ‘교단 100년 이후 원불교 새로운 미래를 어떻게 열어갈 것인가?’라는 화두를 늘 품고 살아간다. 또한 겸허한 마음, 큰마음, 거짓 없는 마음으로 대의에 바탕을 두고, 힘들고 고통스러울수록 불공하는 마음으로 모두를 살려내겠다는 공부표준으로 지금도 끊임없이 적공하는 공부인이다. 
 

수산 박제륜 대호법 약력
- 1939년 7월 21일 전북 남원 출생
- 원기 29년(1944) 4월 19일 입교
- 서울교구 청년연합회 교화부장
- 대치교당 교도부회장
- 대치교당 교도회장
- 서울교구 청운회장
- 법랍 72년 정식 법강항마위 
- 원기 100년(2015) 대호법 서훈

[2020년 6월 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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