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소태산』 이혜화 저자

 

[원불교신문=이여원 기자] 담백함이 돋보인다. 무엇보다 군더더기 없는 그의 글은 쉽고 간결하다. 꾸미거나 설명하려 애쓰지 않지만, 한 장면 한 장면이 생생하게 그려지는 소설 소태산. 그러나 읽는 이는 안다. 한 사람의 생애를, 그것도 대각을 이룬 주세불 성자의 면면을, 대중의 시선에서 그려내는 일이 얼마나 고되고 힘든 작업인지. 일산교당에서 만난 소설 소태산의 저자 이혜화(경식) 교도. 소년처럼 웃는 그의 표정이 맑다. 그의 책 속에 담긴 주인공의 여느 모습도 그와 닮아있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을 품고 그와의 인터뷰가 시작됐다.


15년 만에 다시 쓴 『소설 소태산』을 직접 소개해주신다면
소설 소태산은 글자 그대로 소태산 대종사의 생애를 소설적 기법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2년 전에 출간한 소태산 평전이 역사와 평론의 결합이라면 소설 소태산은 팩트(사실)와 픽션(허구)의 합작이라고 할 수 있겠죠. 평론이 이성과 논리로 재단하는 방식이라면, 픽션은 감성과 상상으로 접근하는 방식이라고 할까요. 

평전으로는 다 드러낼 수 없는 소태산의 정체를 소설로 그려내고 싶었죠. 정산종사는 대종사를 가리켜 ‘집군성이대성(集群聖而大成)’(대종사비명병서)이라고 했는데 처음엔 “이거 너무 나아간 것 아니야?” 했어요. 그러다가 소태산을 알면 알수록 정산종사의 말씀 뜻에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우리 범부들이 감히 닮아갈 모델로서 인간 소태산의 진면목을 그려내고 싶었습니다. 
저는 소태산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생애를 살고 간 사람이라고 보고 작품으로 재현하고 싶었습니다. 작품 이름을 놓고 고심을 많이 했는데 저는 사람 소태산으로 하려고 했었죠. 출판사에서 난감해하길래 양보했지만요.(웃음)    


소설 소태산은 장편소설 소태산 박중빈을 리모델링한 작품입니다. 소태산 박중빈이 ‘오래도록 아픈 손가락’이었다고 작가의 말에서 밝혀 놓으셨는데,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혼신의 힘을 들여 낳은 작품이 너무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 것 같아 가슴 아팠던 것이죠. 생각해보니 적어도 그 책임의 절반은 저에게 있더라고요. 공부나 재능이 미흡한 사람으로서 과분한 도전을 한 것입니다. 생을 마감하기 전에 이제라도 그 절반의 책임을 조금이나마 면해 보려고 재도전한 셈이라고나 할까요. 


소설 소태산을 탈고하시면서 가장 애정이 담긴 챕터나 고심됐던 부분은
구도 행각에 가장 애정을 기울였습니다. 그것이 우리 범부들의 구도 수행에 로드맵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성자나 부처는 우리에게 감동을 줄 수 없고 수행에 도움이 안 됩니다. 우리처럼 욕망하고 고뇌하고 방황하지 않는 성자라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남의 얘기일 뿐이죠. 

고심한 부분이라면 대각을 이룬 이후 법을 설하는 대목이죠. 방황하는 구도자는 매력이 있지만 숭고하고 근엄한 성자는 매력을 얻기 어렵습니다. 인간적 약점이 드러나는 범부는 가깝게 느껴지지만 성스럽고 완전한 성자라면 접근하기 어려워요. 거기다가 고원한 설교까지 늘어놓는다면 매력이 없잖아요. 


소설 소태산에서 중점을 둔 부분은 두 가지로 알고 있습니다. 하나는 현장감을 살리기 위한 ‘사투리’의 전면적 복원이고, 다른 하나는 ‘팩트’의 보완이 아닐까 싶은데, 이 부분의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사투리의 복원은 어려움이 컸죠. 예컨대 영광말은 호남 방언 중에서도 전남 방언, 전남 방언 가운데서는 서북 방언에 속합니다. 

게다가 전남 최북단인 영광과 전북 최남단인 고창은 같은 생활권에 속합니다. 어떻게 영광말의 정체성을 살릴까요. 또한 대종사의 영광 활동시대라면 이미 100년이 지나간 고어가 됩니다. 그럭저럭 여러 문헌과 사람의 자문을 통해 어렵사리 시늉은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복병이 있더라고요. 100년 전 영광말이라면 표준말에 익숙한 현대 독자가 보기에 난해한 겁니다. 불가피하게 타협하고 절충한 측면이 있었죠.

팩트 역시 단순하지는 않습니다. 소설은 본질적으로 픽션이니까 팩트에 얽매일 필요는 없죠. 그러나 소설적 필요에서가 아니라면 쓸데없이 팩트를 왜곡할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순전한 창작이 아닌 전기소설이라면 더욱 역사적 진실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팩트가 소설의 리얼리티를 담보하는 지름길이기도 하니까요. 다만 대종사 생애 가운데는 잃어버린 고리라고 할 부분들이 적잖고 소설로서 작품의 완성도나 퀄리티를 높이기 위해 너무 팩트에 구애를 받아선 안 되니까 여기서도 타협은 불가피했습니다.
 

 

다수의 논저와 다큐, 픽션까지 다양한 소태산 대종사 관련 저술 활동을 하고 계십니다. 관련자료 수집과 취재, 글쓰기까지 그 과정이 녹록지 않을 것 같은데, 집필할 때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또 모든 과정이 중요하겠지만 어떤 부분에 중점을 두는지
우선 자료의 수집이 중요합니다. 다행이라면 저의 법랍 50여 년이 제법 긴 세월이다 보니 자료 수집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던 셈이죠. 수집된 자료를 선별하고, 분석하고, 평가하는 절차가 이어지는데 그 글이 논저냐, 다큐냐, 픽션이냐에 따라 자료를 선별하고 평가하는 태도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논저가 과학이라면 다큐는 역사이고 픽션은 예술이니까요. 소설의 경우는 상상력이 많이 동원되지만 때로는 직관이랄까 영감이랄까 그런 것이 불쑥불쑥 튀어나오기도 합니다.


‘영웅은 그 자신의 비범성이 만들어낸 실체가 아니라 당대 민중의 갈망이 빚어내는 신화의 그림자일지도 모른다’라고 표현한 부분이 있습니다. 이 시대 민중은 어떤 영웅을 갈망하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삶이 팍팍한 시대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민중들이 구세주를 열망합니다. 구세주가 기적을 행하는 초월적 존재여야 한다면 소태산은 민중이 기대하는 구세주로서는 낙제죠. 소태산은 결코 맹목적 민중의 열광에 우쭐대는 꼭두각시 같은 신화 속 영웅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 구세주의 참모습을 보여준 분이죠. 이 시대의 민중도 아직 신비주의 기복신앙이나 시한부 종말론 같은 저급한 수준을 못 벗어나고 있지만, 현저한 탈종교 현상은 역으로 새로운 개념을 가진 종교의 등장을 갈망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지점이 소태산을 거듭 소환하는 뜻과 닿아 있습니다.


앞으로의 작품 활동 계획이나,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체력과 지력이 받쳐준다면 세상을 뜨기 전에 한두 가지 저술을 더 하고 싶지만 미리 밝히기는 조심스럽습니다.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작품이 다하고 있으니 따로 하면 군더더기죠. 다만 작품을 읽을 때 참고할 팁을 하나 전하면, 소태산을 두고 범부로서의 비속성(대각 전)과 성자적 비범성(대각 후) 양면으로 비교해 가며 읽어 보기를 권합니다. 아울러 한 캐릭터(바랭이 혼령)가 소태산의 인간적 욕망과 번뇌를 대변하고, 다른 한 캐릭터(시조시인 조운)는 소태산에게 끊임없이 현실 참여를 유혹하는데, 그 대목을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저자의 가슴 속에 담긴 소태산 대종사는 어떤 인물일까. 이 질문에 그는 먼 곳을 응시했다. ‘영원한 동일시의 대상, 구원(久遠)의 연인, 응석 부리고 싶은 할아버지, 한없이 그리운 스승….’ 길지 않은 그의 대답에 함축돼있는 진하고 애잔한 여운. 소태산을 향한 그의 마음이, 진하고 애잔하게 그의 눈빛에도 똑같이 담겼다.
 

▣ 이혜화 교도 인터뷰는 유튜브 채널 ‘원불교신문TV ’에서 영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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