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산종법사는 ‘웅숭깊은 교단’이란 표현을 썼다. 최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육일대재 시 두 분의 상사와 함께한 소회를 묻는 기자들에게 대답하면서다. 전산종법사는 상사를 할아버지 종법사로 현직의 종법사는 아버지 종법사로 비유하며 교단 일은 당대의 주법인 종법사 중심으로 해야 하지만 상사는 교단의 큰 스승으로 모셔야 한다며, 스승님들이 계시니 큰 힘이 되고 앞으로도 그래야 교단이 아주 웅숭깊어질 것이라고 법문했다.

웅숭깊다는 말은 ‘생각이나 뜻이 크고 넓다. 사물이 되바라지지 아니하고 깊숙하다’라는 뜻이다. 사전적 의미까지 고려한 표현이 아니라 인터뷰 중에 자연스럽게 사용된 말이지만 자꾸 되새겨지는 대목이다.

원불교는 어떤 종교이고 어떤 교단일까. 교단을 구성하는 재가출가 교도들은 어떻게 느끼고 있으며, 원불교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부드러운 원불교, 따뜻한 원불교, 무덤덤한 원불교, 스마트한 원불교, 촌스러운 원불교, 친근한 원불교, 다가가기 어려운 원불교, 너그러운 원불교…. 원불교라는 이름 앞에 여러 가지 형용사를 붙여보는 것도 우리의 이미지를 파악하는 데 좋은 방법이 될 듯하다.

무엇에 대한 것이든 인위적으로 급조한 이미지는 헛된 것이지만 오랜 시간을 두고 만들어진 분위기와 소양은 본질을 드러낸다. 그런 의미로 ‘웅숭깊다’라는 형용사는 원불교의 본질을 잘 드러내주는 표현의 하나가 되어도 좋을 듯하다.

웅숭깊다의 맞은편에는 ‘되바라지다’란 표현이 있다. ‘쉽사리 바닥이 드러나 보임, 튀어져 나오고 벌어져서 아늑한 맛이 없음, 남을 너그럽게 감싸 주지 아니하고 적대적으로 대함, 어린 나이에 어수룩한 데가 없고 얄밉도록 지나치게 똑똑함’ 등으로 풀이된다. 이 표현들을 교단에 대입해보면 우리 교단은 쉽사리 바닥이 드러나지 않는 깊은 교단이어야 하고, 누구든 적대적으로 대하지 아니하고 너그럽게 감싸주는 교단이어야 한다.

재주나 지식을 앞세우기보다는 어수룩해 보여도 덕이 넉넉한 교단이어야 한다. 그러하려면 소태산 대종사의 대도정법을 만난 재가출가 교도 모두가 신앙과 수행의 깊이를 더해야 한다. 속 깊은 마음공부만이 우리 삶의 뿌리를 깊게 할 것이며, 우주만물이 서로 없어서는 살 수 없는 은혜의 관계임을 깨달아 처처불상 사사불공의 신앙을 제대로 해야 비로소 모두를 포용하는 너그러운 삶이 가능할 것이다.

비록 세상은 각박해져도 선후진 사이에 뜨거운 정의와 윤기는 날로 더하고 스승을 향한 신성도 깊어져야 한다. 어리석은 듯 무아봉공의 덕행을 무한히 쌓아갈 때 인과의 진리 앞에 떳떳한 웅숭깊은 교단이 될 것이다. 상극의 기운이 뻗지르던 일제의 엄혹한 압제 속에서도 소태산과 소수의 제자들이 뿌리 내려준 초기 교단의 웅숭깊음을 다시 생각해보자.

[2020년 6월 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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